유영모-함석헌 선생 생명-평화사상 담은 책 2권 나란히 출간

  • 입력 2006년 3월 2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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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1901∼1989)과 그의 스승 다석 유영모(1890∼1981)는 공교롭게도 생일이 같다. 양력으로 3월 13일생이다. 두 사람은 타계한 날도 거의 같았다. 다석이 2월 3일 숨을 거뒀고, 함석헌은 2월 4일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함 선생은 스승이 돌아가신 같은 날 세상을 떠나는 게 송구스러워 그날을 넘긴 다음 돌아가신 것”이라고. 다석 탄생 116주년이자 함석헌 탄생 105주년을 맞아 두 사람의 사상과 면모를 보여 주는 2권의 책이 나란히 출간됐다. 지난해 창립된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현암사)와 함석헌의 제자인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가 곁에서 지켜본 함석헌의 인간적 면모를 그린 ‘내가 본 함석헌’(아카넷)이다.》

‘다석강의’는 다석이 1927년부터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서울 YMCA에서 무려 35년간(1928∼63년) 펼친 연경반(硏經班·경전연구반) 강의 중 1956년 10월 17일∼1957년 9월 13일의 약 1년치 내용을 속기한 것이다. 다석은 자신이 쓴 다석일지를 제외하고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자신의 죽음을 예언해 제자들이 부랴부랴 속기록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1년 치 강의 속기록은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육성기록으로 꼽힌다. 다석은 무엇보다 기독교 사상을 우리 것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사상가였다. 하느님-예수의 관계를 유교적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완성으로 해석했고, 도덕경의 도(道)자를 하느님이 계시는 저 높은 곳으로 머리(首)를 향하여 달려가는(走) 것을 나타낸 것으로 새겼다.

다석은 또한 한글은 하느님이 세종대왕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보낸 계시라며 우리말 단어 하나하나를 새롭게 새겼다. 그는 하느님을 우리말로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분이라는 뜻에서 ‘없이 계신 분’이라고 풀었고 ‘오늘’은 하루가 늘, 곧 영원이라는 의미에서 ‘오! 늘’로 새겼다. 훗날 함석헌의 대표적 사상으로 알려진 씨ㅱ(백성) 사상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사상도 그 원류는 다석이었다.

다석이 심오한 사상가였다면 함석헌은 그 사상을 사회적 삶 속에서 구현한 실천가였다. 함석헌은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했을 때 새로 교장으로 부임한 다석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기독교 사상의 내면화를 강조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 기독교 사상가로 새롭게 태어난다.

‘내가 본 함석헌’에는 1955년 12월 14일 함석헌이 태어난 지 2만 일 되던 날 밤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함석헌은 이날 스승인 다석과 만둣국을 나눠 먹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그래프로 그려 설명했다. 포물선 형태로 완만히 상승해 간 그 그래프는 다석을 만난 1921년과 우치무라를 만난 1924년에는 수직 상승이 이뤄졌다.

저자인 김용준 교수의 성장과정에도 그런 수직 상승이 있었다. 1949년 서울 YMCA에서 우연히 함석헌의 강연을 들은 바로 그날이었다. 그런 김 교수가 그려낸 함석헌의 모습은 시 아닌 시라도 읊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이며, 이승만의 반공독재와 박정희의 군부독재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면서도 외국에서는 결코 한국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담지 않는 진정한 애국자이며, 무엇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평생 실천한 ‘기다림의 신학자’였다.

1950년경 다석 유영모(왼쪽)와 함석헌이 함께 찍은 사진.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다석강의 속기록을 작성한 김흥호 목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기다림의 신학은 무엇인가. 함석헌은 우리 민족 반만년의 역사적 주제를 ‘고난의 역사(歷史)’로 이해했다. 일제강점기와 분단을 ‘가시면류관’으로 삼는 그 수난의 끝에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役事)가 기다리고 있는 역사로. 그래서 그가 이 땅의 씨ㅱ들에게 부탁한 한마디는 지금 더욱 생생한 감동으로 다가선다.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면서 수고함과 기다림을 배우라.’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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