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 입력 2006년 2월 18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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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올리버 색스 지음·조석현 옮김/444쪽·1만4800원·이마고

오랫동안 뛰어난 성악가로 명성을 날렸던 음악교사 P.

그는 병실 침대에서 내려온 뒤에도 신을 신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좀 도와드릴까요?” “뭘요? 뭘 도와준다는 거죠?” “선생님이 신을 신는 것 말입니다.” “아차, 신을 깜빡했군!”

그는 계속해서 신발을 찾았지만 눈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자기 발에서 멈추었다. “이게 내 신 맞죠?” 농담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미친 것일까? “내 신 맞죠? 아닌가요?” “아닙니다. 그건 선생님 발이에요. 신은 저쪽에 있어요.”

그는 검사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다!

P는 ‘시각인식 불능증’ 환자다. 그의 뇌는 사물의 실체와 개별성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가족도, 동료도, 제자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그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누구냐고 묻곤 했다.

P는 생기가 없는 추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그에게는 현실의 ‘시각적 자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차라리 그게 다행일까.

이 책은 신경장애인들에 대한 임상보고서다. 저명한 신경학자로 ‘의학계의 계관시인’으로 불리는 저자는 환자들의 병력뿐 아니라 그들의 개인사를 파고들어가 특수한 장애에 맞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과 경험을 함께 나눈다.

독자들은 기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이들에게서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두뇌의 촘촘한 신경 얼개가 단 하나만 헝클어져도 덧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우리 존재의 너무도 연약함을 본다. 겸허함을 배운다.

크리스티너는 두 아이를 둔 27세 여성이다. 그녀는 ‘급성다발신경염’으로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제6감인 고유감각을 상실했다.

근육과 힘줄, 관절 어디에도 감각이 없다. 자신의 손과 발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몸이 사라져버린 것 같다. ‘육체적 자아’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 몸을 움직이려면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고 자신의 몸을 기계처럼 ‘조작’해야만 한다.

“내 자신에 대한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이제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아요. 내가 정말 크리스티너일까요? 대체 그녀는 어디로 갔죠?”

이 가슴 아픈 존재의 상실감은 기억상실증 환자에게서 더욱 뚜렷하다.

신경학 전문의 올리버 색스는 자신의 대표 저작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갑자기 닥친 기이한 신경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 환자의 사례를 통해 우리 삶의 이면을 보여 준다. 그림 제공 이마고

49세의 지미는 최근 30년간의 기억이 싹둑 잘려져 나갔다. 그는 오로지 30년 전의 과거에 파묻혀 산다.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것을 보여 주어도 몇 초 후에는 잊어버리고 만다. 체스를 하다가도 자기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까먹기 일쑤다.

그의 인생은 망각의 세계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는 순간의 존재였다. 뿌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잃어버린 영혼’이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지미는 그 ‘망각의 우물’에서 뭔가를 퍼 올리고자 했다. 뭔가를 하고 싶고, 뭔가가 되고 싶고, 뭔가를 느끼고 싶어 했다. 뭔가를 애타게 찾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으나 삶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일과 사랑’을 추구했다.

저자는 어느 날 우연히 성당에 앉아 있는 지미를 발견했다. 자신의 온 존재를 기울여 미사에 열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어느 하나의 감정에 몰두한 채 자신의 모든 것을 쏟고 있는 그에게선 영혼의 그림자 같은 게 느껴졌던 것이다.

“인간이 단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실존의 차원은 기억이나 뇌의 기능, 두뇌만으로는 떠받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게 아닐까. 과학은 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을 변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1985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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