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영화]‘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예술과 사랑

  • 입력 2006년 2월 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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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타계한 백남준 선생은 생의 영원함을 믿기 때문에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고 아내 구보타 시게코 씨가 전했습니다. 실제로 2년 전, 미국 뉴욕에서 팔과 다리가 휠체어에 묶여 있으면서도 ‘아임 해피(I'm happy)’라고 천진하게 웃던 그의 얼굴은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 듯 보였습니다.

“남편의 육신은 이제 없지만, 늘 곁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구보타 씨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남편이 죽었지만 부재에 따른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존 레넌의 아내 오노 요코와 닮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에서 ‘예술과 사랑’이야말로 생과 사의 경계를 초월하는 영원의 영역이 아닐까요.

왜 우리는 영원을 갈망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삶의 유한함 때문이 아닐까요. 영원을 추구하는 예술과 사랑은 한순간 찰나적이고 부질없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메시지를 절묘하게 표현한 영화가 있으니, 바로 ‘잉글리시 페이션트’(1997년)입니다. 유부녀 캐서린과 독신 탐험가 알마시 백작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는 곳곳에 예술과 사랑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은유로 가득합니다.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동굴 벽화가 대표적입니다. 불륜을 알아챈 남편이 자신을 비행기에 태운 뒤 알마시 백작을 죽이려던 시도가 실패하는 바람에 온몸에 큰 상처를 입고 동굴로 옮겨진 캐서린은 구조를 약속하고 떠난 알마시 백작을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리고 영원을 갈망한 인간의 흔적인 동굴 벽화들을 혼신을 다해 베껴 그리며 이런 편지를 씁니다.

“저는 죽어 갑니다. 많은 연인과 사람이, 우리가 맛본 쾌락들이, 우리가 들어가 강물처럼 유영했던 육체들이, 이 무서운 동굴처럼 우리가 숨었던 두려움이, 이 모든 자취가 내 몸에 남았으면 해요. 우리야말로 진정한 ‘국가’랍니다. 단지, 지도에 그려진 선이 아니에요. 당신은 날 바람의 궁전으로 데리고 나가겠지요.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예요. 그런 곳을 당신과 함께 걷는 것, 당신과 지도가 없는 땅을 걸을 수만 있다면.”

캐서린과 알마시에겐 사랑이 곧 국가이자 종교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사막을 사흘간 걸어 온 알마시는 동포인 영국 군인에게 도와달라고 애걸하지만, 정작 적(독일군)으로 오해받아 갇히고 맙니다. 국적과 누구 편이냐는 이념을 묻는 ‘찰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사투하는 알마시의 영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흔히들 남자는 이념을 위해 죽고 여자는 사랑을 위해 죽는다지만, 알마시는 사랑을 위해 동포와 이념을 배반합니다.

영화에서는 순간과 영원을 대비시켜 보여 주는 상징이 많습니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전쟁터(제2차 세계대전)는 생명이 숱하게 명멸하는 죽음의 공간이지만, 또 다른 무대가 되는 사막이라는 공간은 영원의 공간입니다. 또 하나의 커플 한나(간호사)와 킵(인도 군인)의 사랑은 순간과 찰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꺼져 가는 불꽃에 의지해 허리에 동아줄을 묶고 천장 벽화들을 보는 한나와 킵 대위의 모습은 이 영화 속 빛나는 명장면입니다. 불꽃의 밝은 빛이 닿을 때만 모습을 보이는 천장 명화 속 천상의 미소들은 찰나 속 영원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드러냅니다.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이 시대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았던 한 예술가의 삶과 정신을 기리며 모든 인생이 다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을 사랑과 예술의 힘을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통해 느껴 보았습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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