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들이 말한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번역 출간

  • 입력 2005년 12월 13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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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반대해 ‘차베스가 감옥에 가면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멋질까’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흔드는 시위대(위), 우파였던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의 소환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페루 시민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가 선포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좌파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반대해 ‘차베스가 감옥에 가면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멋질까’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흔드는 시위대(위), 우파였던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의 소환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페루 시민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가 선포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동유럽 공산권이 무너진 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하며 이를 ‘역사의 종언’이라 불렀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드는 모퉁이를 장밋빛으로 물들였던 그의 낙관적 전망은 10년도 되지 않아 회색빛으로 바뀌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계화라는 바람을 타고 탈영토적 시공간을 질주하는 동안 민주주의는 영토국가에 발목이 묶인 채 뒤뚱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평사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그 같은 불균형으로 인해 야기된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후쿠야마, 울리히 벡, 클라우스 오페, 피에르 부르디외 등 세계적 명성을 지닌 학자들의 연쇄 기고문과 대담을 정리한 이 책이 처음 발간된 것은 2000년. 하지만 여기에 담겨 있는 회색빛 전망과 고민들은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점에서 ‘위기의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역사의 종언’을 주장했던 후쿠야마 교수는 러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며 “헌팅턴이 말한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 명백히 그 정점을 넘어 다시 밀려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자유민주주의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고, 단일한 공동체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데 개인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잘못 이해된 자유주의’로 인해 공동체성이 파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그문트 바우만 영국 리즈대 명예교수는 민주주의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기능할 수 있는데, 현대 민주주의는 사적 공간의 비대화와 공적 공간의 취약화로 귀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전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적인 경험과 비밀을 고백하는 TV 토크쇼의 유행과 다국적 자본 앞에 무력한 주권국가가 이를 대변한다고 설명했다.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는 “세계화의 논리에 따르면 여기가 아니라면 저기로 가면 된다”면서 “세계화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살아 있는 시체, 즉 좀비로 탈바꿈시킨다”고 세계화로 인한 민주주의의 고갈을 비판했다. 그는 또 각종 전문적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의 증대는 정부와 의회를 무력화하고,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나 ‘인종차별적 극우 정당과 손을 잡는 행위’처럼 예전에 금기시되던 일에 대해 “왜 안 되겠어”라는 반응을 낳고 있다고 우려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 내부에서도 촉발된다. 세계 각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의 지지도는 계속 하락세를 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웃국가들로부터 유례없는 불신을 받고 있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나 베네수엘라의 위고 차베스 대통령처럼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공공연하게 무시하는 ‘선출된 지도자’들도 늘고 있다.

클라우스 오페 독일 훔볼트대 명예교수는 이런 현상들이 공공의 영역에 대한 국민의 ‘신뢰의 철회’ 현상을 야기해 정치 불신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의 지지도 하락과 정부 및 의회의 권능을 대신하는 각종 위원회의 증설, 거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 약화, 개인주의 성향의 강화로 인한 공공성의 약화라는 문제가 똑같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주의 이행이론의 대가 길레르모 오도넬 미국 노터데임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린 ‘문명과 평화 국제포럼’에서 ‘제도화한 노름(institutional wager)’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민주주의가 여전히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적 선거는 잘못된 사람을 뽑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노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노름이 현재의 잘못된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을 준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 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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