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교우록’…때론 친구처럼 세상을 보듬고 싶다

  • 입력 2005년 9월 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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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유종인 씨. 빼어난 서정의 세계를 보여 주는 새 시집 ‘교우록’은 홍매화와 산 까치, 선인장과 바람, 화장실과 동백나무, 버드나무와 흰 말 같은 서로 거리가 있는 것들이 어떻게 절친한 친구가 되는지를 보여 준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시인 유종인 씨. 빼어난 서정의 세계를 보여 주는 새 시집 ‘교우록’은 홍매화와 산 까치, 선인장과 바람, 화장실과 동백나무, 버드나무와 흰 말 같은 서로 거리가 있는 것들이 어떻게 절친한 친구가 되는지를 보여 준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교우록/유종인 지음/165쪽·6000원·문학과지성사

시인 유종인 씨는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올해로 데뷔 10년째를 맞는다. 그의 첫 시집 ‘아껴 먹는 슬픔’(2001)은 그를 둘러싼 세상과의 격렬한 충돌과 탈주를 바라는 격정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새 시집 ‘교우록’은 성(聖)스러움과 속(俗)됨, 죽임과 살림이 서로의 얼굴을 친구처럼 쓸쓸하게 보듬다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성숙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같은 풍경은 무심한 삼라만상에 유심한 언어들을 부여하는 서정시 본령의 모습으로 뛰어나게 조형되고 있다.

‘손바닥선인장엔/골고다의 예수보다 훨씬 많은/바늘 같은 못들이 손에 박혀 있다//(…)//아니, 무수한 바늘을 품고도/仙人(선인)의 掌(장)은 스스로/손끝 하나 긁히거나 찔리는 법이 없다/그림자조차 남기는 법 없는/궁금한 바람조차 푸른 손뼉 소리나 듣자고/신선의 손목을 건 듯 흔들고 지나간다.’(‘가시’ 일부)

가시 돋친 선인장과 투명한 바람이 어울리는 이 같은 시인의 상상력은 이것과 저것, 무연(無緣)한 듯 보이는 만상이 사실은 한뿌리를 가졌으며, 연결돼 있다는 믿음과 기대에서 나온 것이다.

시인은 옛날 살던 동네를 찾아가 아직 남은 험한 풍경을 돌아본 시 ‘사나운 동네’의 끝에서 “내 마음보다 사나운 동네가 어딨겠는가”라고 읊조린다. 시인의 상상력은 세상이 험해 보이면, 내 마음이 그러해서일 것이라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주위를 사심 없이 관조하는 데서 나온 유머와 여유를 통해 풍성하고 부드러우며 살가운 시들을 내놓고 있다.

‘낡은 고물상 트럭 짐칸에/산수화 액자 하나 실려 있네/곰팡이가/기러기떼 나는 가을 하늘까지 피어 있네/궁금한 듯 봄 햇살이 들여다보네.’(‘떠도는 산수화’ 일부)

시인이 보기에 이 같은 유머러스한 상상력이 출입하지 못할 공간은 없다.

‘신축 성당 화장실의 冬柏(동백) 나무 화분이/서리 낀 창문 밖을 내다본다//하느님도 이승의 뒷간에서 똥 누고 기일게/물 내리는 소릴 들을 때가 좋았어 하늘엔/구린 뒷맛이 없으니. 하늘엔/화장지처럼 고운 살결 가진 종이도/물론 없을 거야//동백, 널 알아본 건, 네 꽃 주둥이, 아니/그 붉은 陰部(음부)의 입술 때문이지/모든 恥部(치부)가 어쩜 이 겨울에도 그리 아름답게/피어날 수 있겠니.’(‘화장실의 동백나무’ 일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모든 것들의 관계가 친구처럼 될 수 있는 화해의 공간을 꿈꾸는 시인의 마음에는 아직도 순정적인 채로 남아 있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발걸음이 있다. 그 발걸음에는 어쩌면 그런 순정은 앞으로 만나지 못하거나 결국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그에게 성숙을 가져다 준 그 슬픔이 이 시집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눈이 내렸다/어둠 속에서/말 못할 것들이 흩날렸다//내리는 눈은 친구가 아니라서/바닥에 쌓이거나/행인의 발길에 밟힐 것이다//(…)//친구는, 내려오는 친구는/저렇게 하얗고 속절없이 많아도/다 내가 더럽혀야 할 눈이었다/내리지 않는 눈이/가장 순수한, 착한 눈이었다/친구는 죽은 친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제일 좋은 친구다.’(‘교우록’ 일부)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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