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삶/김문성]국악과 결혼했어요

  • 입력 2005년 7월 18일 03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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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모아둔 결혼자금을 깨서 의미 있는 공연을 마련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고(故) 김옥심 명창을 추모하는 공연이었다. 당시 한 방송사 PD는 “어쩌자고 이런 사고를 쳤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20대가 끝나기 전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꼭 해보고 싶었다고.

‘재야 명인’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비록 결혼자금이 희생됐지만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멋진 20대의 추억을 만들었다며 스스로 기뻐했다.

올봄에는 한 음반소장가가 사업부도 때문에 30여 년간 수집한 음반들을 급매물로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음기 음반 2000여 장인데 매우 귀한 음반들인 데다 보관상태도 좋았다. 워낙 고가여서 국내에서는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일본 쪽에서 이를 인수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소장가는 몇몇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문화예술단체 등에 음반 인수를 제안했지만 다들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나는 또다시 결심했다. 결혼자금을 다시 깨고, 부족한 금액 수천만 원을 대출받아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하소연했다. 봉급쟁이 형편에 음반 전부를 인수할 수 없으니 반만이라도 인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인수금액은 서울 시내에서 조그만 아파트 한 채를 전세로 얻을 수 있는 규모. 덕분에 요즘 나는 매달 수십만 원의 이자를 내고 있다.

이를 취재하던 한 잡지사 기자가 내게 물었다. “결혼은 어떡하려고 사고를 쳤어요?” 내 대답은 5년 전과 비슷했다. “30대가 끝나기 전에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지난해 가을 미국에 단기 연수 갔을 때의 일이다.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국악음반을 추적하기 위해 골동품가게를 찾아다녔다. 하늘이 움직인 걸까. 로스앤젤레스의 한 골동품가게에서 ‘고려레코드사’ 라벨이 붙은 애국가 음반을 찾아냈다. 광복 후 우리 자본으로 만든 최초의 음반이자 최초의 애국가 음반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기록에만 있을 뿐 실물이 발견되지 않아 음반계의 ‘전설’로 남아있던 고려레코드사의 1947년 ‘애국가’ 음반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먼지에 잔뜩 뒤덮인 채 잠자고 있었다.

애국가 음반을 가지고 귀국한 뒤 취재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료가 해외로 반출되기는 쉬운데 다시 한국으로 가져오기는 너무 큰 수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사고 친 겁니다.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이런 일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평생 마음의 큰 짐이 될 것 같아서요.”

이제부턴 40대에 해야 할 목표를 정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약력▼

1971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는 회사원이지만 우리 가락에 푹 빠져 사는 국악 마니아이기도 하다. 현재 라디오 국악방송에서 ‘김문성의 신민요 80년’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김문성 김옥심추모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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