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6년 일간지 만세보 창간

  • 입력 2005년 6월 17일 03시 21분


코멘트
99년 전 오늘, 1906년 6월 17일 만세보(萬歲報)가 창간됐다. 동학의 영수였던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천도교에서 만든 신문이다. 이 신문의 창간 취지는 민족정신 고취, 국민 계도 등이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 등의 반민족적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자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한국 신문 사상 처음으로 한자 옆에 한글로 토를 달기도 했다.

만세보는 이런 저런 공헌이 있지만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연재소설이다.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소설을 도입해 한국 문학사 및 언론사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연재소설은 이인직(李人稙)의 ‘혈(血)의 누(淚)’였다. 한국 신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이다. ‘혈의 누’는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일청(日淸)전쟁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一境)이 떠나가는 듯 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친 티끌뿐이라. 평양성 모란봉에 떨어지는 저녁 빛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숨이 턱에 단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리어….’

소설은 이 같은 배경 묘사로 시작된다. 묘사를 맨 앞에 내세워 소설을 써 나간 경우는 처음이었다. 새로운 시도였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혈의 누’가 신소설의 효시로 불리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

‘혈의 누’의 인기는 높았다. 1906년 10월 10일자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끝나자 만세보 편집국엔 소설을 다시 연재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쏟아졌다. 나흘 뒤 만세보는 다시 연재소설을 내놓았다. 10월 14일자부터 시작된 이인직의 ‘귀(鬼)의 성(聲)’이었다.

고종도 만세보의 애독자였다. 당연히 연재소설도 읽었을 것이다. 고종은 만세보를 위해 내탕금(內帑金·왕의 사유 재산) 1000원을 하사하기도 했다. 당시 만세보의 1년치 구독료는 3원이었다.

고종의 후원과 천도교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만세보는 경영난에 시달렸다. 창간 1년을 갓 넘긴 1907년 6월 29일자(293호)를 끝으로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그 마지막 날, 만세보는 신문과 함께 전단 안내문도 발행했다. 그 전단엔 이렇게 써 있었다. ‘기계 파손으로 정간하며 다시 발간될 시기를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