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민족주의 학설 체계화 美 앤더슨 교수 시대진단

  • 입력 2005년 4월 26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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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관악구 신림8동 한국동남아연구소에서 만난 베네딕트 앤더슨 교수. 그는 “한국을 찾은게 동생(페리 앤더슨 UCLA 역사학 교수)보다도 늦어 부끄럽게 생각한다”면서 “그래도 2002년 월드컵때는 한국팀을 열렬히 응원했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25일 서울 관악구 신림8동 한국동남아연구소에서 만난 베네딕트 앤더슨 교수. 그는 “한국을 찾은게 동생(페리 앤더슨 UCLA 역사학 교수)보다도 늦어 부끄럽게 생각한다”면서 “그래도 2002년 월드컵때는 한국팀을 열렬히 응원했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20세기 민족주의는 19세기 민족주의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21세기 민족주의는 기존의 민족주의와 전혀 다른 ‘돌연변이 민족주의(mutant nationalism)’가 될 것입니다.”

민족주의가 근대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학설을 체계화한 베네딕트 앤더슨(69)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가 한국을 처음 찾았다. 그가 1984년 발표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는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과 함께 민족 또는 민족주의가 근대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구성됐음을 정교하게 이론화한 저서로 꼽힌다.

앤더슨 교수는 한국동남아연구소와 서강대 동아연구소의 공동 초청으로 24일 방한해 26일 서강대 김대건관에서 ‘동남아의 부르주아 과두제’를 주제로 특별강연한 뒤 출국했다. 25일 저녁 그를 만나 최근 동북아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민족주의의 파고(波高)와 관련해 앞으로 민족주의의 전개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민족주의는 21세기에도 번성할 겁니다. 민족주의는 이제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피부 같은 존재가 됐어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공동체를 유지해주니까요. 문제는 국내외 갈등상황만 발생하면 이 피부가 벌겋고 크게 부풀어 오른다는 데 있습니다.”

동북아에서는 민족주의의 파고가 높게 일고 있는 반면 유럽연합(EU)에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통합의 움직임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독일출신의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토 16세)교황이 됐을 때 영국신문에서는 ‘나칭거’(나치+라칭거의 합성어)라는 제목을 뽑을 정도로 민족주의는 모든 나라에 뿌리 깊게 잠복해 있습니다. 지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가장 두드러진 나라가 바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란 점도 이를 증명해요. 동북아의 민족주의 강화현상에도 자본주의화를 택함으로써 혁명의 정통성을 상실한 중국 정부의 국내 정치적 불안감이 깔려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베트남 유모에게서 자라고 아일랜드 국적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앤더슨 교수는 19세기와 20세기에 민족주의가 정복과 팽창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21세기 민족주의는 오히려 분열과 해체, 응축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국가의 확립이 국경선의 성역화로 나타나면서 1960, 70년대 이후 영토를 넓힌 민족국가는 없지만 구소련이나 유고연방처럼 오히려 영토가 나눠지는 경우는 늘고 있어요. 중국 인도와 같은 다민족국가도 이런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지구화의 흐름 속에 본토가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민족구성원들에 의해 민족주의가 근본주의화하는 문제도 지적했다.

“아일랜드 본토에서는 아일랜드의 세계적 축제인 ‘성 패트릭 데이’에 동성애자들의 참가를 진작에 허용했지만 미국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아일랜드 인들은 전통에 어긋난다며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대만 공격을 가장 거세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 본토인이 아니라 미국의 화교들입니다. 힌두교 근본주의 본부가 있는 곳은 인도가 아니라 영국 런던이죠.”

앤더슨 교수는 이러한 ‘원거리 민족주의’에는 과거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민족주의와의 행복한 동거를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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