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산울림소극장 20주년 맞은 임영웅 대표

  • 입력 2005년 3월 15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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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소극장 개관 20주년을 맞아 16번째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고 있는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대표. 이종승  기자
산울림 소극장 개관 20주년을 맞아 16번째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고 있는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대표. 이종승 기자
《한국 연극의 명소 산울림 소극장이 최근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1985년 3월 5일 문을 연 산울림 소극장은 원로 연출가 임영웅(69) 극단 산울림 대표가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던 자신의 집을 헐고 사재를 털어 세운 것. 연극평론가 김윤철이 “산울림 소극장 20주년은 ‘성년식’보다는 ‘회갑연’ 같다”고 표현했을 만큼 산울림 소극장이 우리 연극계에서 이루어 낸 업적은 20년 세월의 중량보다 훨씬 크다. 산울림 소극장은 ‘연극학교’로 불리며 수많은 연출가와 명배우를 배출했고, 연극이 침체됐을 때 ‘위기의 여자’ 등 이른바 여성 연극 붐을 주도하면서 중년 여성이라는 새로운 관객층을 개발했다. 개관작이었던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를 20주년 기념작으로 다시 공연 중인 산울림 소극장에서 임 대표를 만났다. ‘고도…’는 나무 한 그루뿐인 어느 시골길에서 ‘고도(Godot)’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나누는 무의미한 대화가 주된 내용인 부조리극으로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됐다.》

―36년 동안 16번째 ‘고도’ 연출인데…. 아직도 (고도를) 기다리시나요.

“(웃음) 나도, 극단 산울림도, 산울림 소극장도 ‘고도’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어요. 1969년 국내 처음으로 ‘고도’를 선보인 뒤 이 작품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에 극단 산울림을 만들었으니까요. 극단 첫 작품으로 ‘고도’를 했고 산울림 소극장 개관작도 당연히 ‘고도’였죠. 세계적으로도 이 작품을 30여년 동안 줄곧 연출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이 작품은 매우 치밀하게 쓰여 매번 감탄하게 됩니다. 무성시대의 즉흥 연기부터 극중극, 관객 끌어들이기 등 다양한 방식이 총동원된 작품이죠.”

‘고도’를 본 사람들 모두가 궁금해 하는 질문, 그렇기 때문에 그가 수십 년 동안 수백 번도 더 들었을 우매한 질문, ‘주인공들이 그토록 기다리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는 존재, 고도는 과연 무엇이며 누구인가’는 생략했다. 어차피 좋은 연극이란 질문을 던지는 것일 뿐, 답을 찾아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니까.

배우들과 연습하는 장면. 이종승 기자

산울림 소극장 1층 카페에는 ‘고도’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카페 한쪽에 세워진 대형 ‘고도’ 공연 사진 속 주인공에 눈길이 갔다.

“초연을 포함해 내리 세 번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던 함현진이죠. 중동 땅에서 의문사했는데 ‘고도’를 거쳐 간 배우 중 가장 기억에 남아요. 좋은 배우였지만 대사를 잘 잊었지. 어차피 의사소통이 안 되는 대화로 이루어진 연극이라 함현진은 능청스럽게 즉석에서 대사를 지어냈어요. 그러자 당황한 상대 연기자는 대사를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정작 함현진은 연기상까지 탔죠. 하하.”

초연 당시 이 작품은 공연 전에 전회 전석이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는 “수십 년 간 연극을 해오면서 그런 적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길다(5분 휴식을 포함해 2시간 20분). 심각하고 어려운 연극을 싫어하는 요즘 관객들에겐 쉽지 않을 터. 그는 “좋은 연극이 계속 올려지려면 ‘관객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요즘 초등학교에서 ‘학예회’가 거의 없어졌다더군요. 사소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 아주 큰 손실이라고 생각해요. 직접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려보는 것만큼 아이들에게 소중한 문화적 체험이 없거든요. 연극이나 무용을 보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관객은 영화나 뮤지컬 같은 가벼운 것만 찾게 되죠. 훈련된 관객이 있어야 진지한 연극, 잘 만든 연극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대학로 연극은 지금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습니다. 연극의 전성기는 1960, 70년대로 끝난 걸까요.

“연극은 ‘전성기’가 없었다고 봐요. 1950, 60년대는 국산 영화에 치였고 1960, 70년대는 TV가 나타났고, 1980, 90년대는 비디오니 인터넷이 생겨났습니다. 요즘은 공연계에서도 뮤지컬이 인기니 연극은 늘 존재를 위협받았죠. 그럼에도 소극장 연극이 활발했던 1960, 70년대를 연극의 전성기라고 부른다면 그건 작품이나 관객 때문이 아니라 당시 연극을 하던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순수하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요즘은 지원금 받으면 딱 그만큼만 작품하고, 돈 없으면 안하고….”

그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험생을 겨냥한 다이제스트 식의 연극이라든가, 일부 중극장에서 배우가 무선 마이크를 끼고 공연하는 것에 대해 ‘연극에 대한 모독’이요, ‘연극하는 정신 무장이 안 돼 있는 짓’이라고 질타했다.

“좋은 연극이 나오려면 연극인 스스로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해요. 왜 연극을 하는가를 늘 되새겨야죠. 나는 좋은 연극은 관객의 삶에 보탬이 되고 나아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일각에서는 그가 상업적인 장르인 뮤지컬을 싫어한다고 소문나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뮤지컬에 우호적이다. 그는 국내 최초의 본격 뮤지컬로 꼽히는 ‘살짜기 옵서예’(1966)의 연출자이기도 하다. 올해 상반기 대학로를 뮤지컬이 ‘점령’한 것에 대해 그는 “그만큼 연극을 제대로 못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극과 뮤지컬은 달라요. 연극은 연극 나름대로의 진지한 맛이 있는데 그걸 버리고 당의정만 입혀서 뮤지컬처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경쟁이 안 되지. 연극은 가장 연극답게 만들었을 때 경쟁력이 있는 거예요.”

그는 연극계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몇 안 되는 현역 원로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자세가 기우뚱해졌고, 당뇨에 고혈압까지 겹쳤지만 그는 연극을 놓지 못한다. ‘연극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그는 “좋아서 이 ‘지랄’을 하지만 사실 인구 1000만 명의 대도시 서울에서 100석 남짓한 소극장이 자생하기 어렵다는 것은 너무 슬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다른 극단에 극장을 빌려주고 편하게 대관료만 챙겨도 되련만 그는 절대 대관 공연은 하지 않는다. ‘산울림’의 이름을 믿고 찾아 온 관객에게 행여 질 낮은 연극을 보여주게 될까 하는 우려에서다. 그는 “소극장 운영이 하도 힘들어 내년에는 믿을 만한 몇몇 극단과 손잡고 일하는 것도 생각 중”이라고 했다.

한때 공연계에서는 술자리에서 그가 했던 “산울림 소극장을 폭파하고 싶다”는 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용히 폐관하면 문화면 1단 기사지만 극장을 폭파하면 사회면 톱기사가 돼 어려운 소극장 현실에 관심을 가져줄 것 아니냐”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지금도 그런 심정이냐고 묻자 그는 ‘고도’에 나오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사로 답변을 갈음했다.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임영웅 대표는▼

△1936년 서울 출생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사육신’으로 연출 데뷔

△조선일보, 대한일보 문화부 기자 등을 거쳐 1963년 동아방송 개국 과 함께 드라마 PD로 활동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 한국 초연 이후 지금까지 16번이나 연 출을 맡았다. 한국 극단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참 가(1989년), 아일랜드 더블린영화제 초청 공연(1990년)

△1970년 극단 ‘산울림’ 창단. 이후 ‘위기의 여자’, ‘딸에게 보내는 편 지’,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세자매’ 등 100여 편 공연

△동아연극상(1986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7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1995년), 동랑연극상(1995년), 보관문화훈장(2004)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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