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닭 선생이 鷄씨에게

  • 입력 2005년 1월 3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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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乙酉)년 새해 아침 멀건 햇살이 홰에 걸릴 즈음 젊은 수탉 ‘계(鷄) 씨’가 이웃어른 ‘닭 선생’을 찾아 세배했다.

올 한 해도 건강하시고 오래 사십시오. 예끼, 이 사람아 늙은 닭이 더 오래 살아 무슨 영화(榮華)를 보겠다고 그런 악담을 하나. 악담이라뇨? 아무리 닭 목숨이 사람 손에 달렸다고 한들 어르신처럼 천수(天壽)를 누리는 닭도 있어야지요.

천수를 누린다? 어디 사는 게 누리는 것이던가. 존재(存在)하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의 팔 할은 고통일세. 내게도 자네처럼 매일 새벽 여명(黎明)에 홰를 치며 아침을 알리던 화려한 날들이 있었지. 또 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볏을 피로 물들이던 자랑스러운 날들도 있었네. 하지만 이제 다들 떠나고 나만 남았어. 돌이켜보면 모두가 헛된 것이야. 그렇다고 낙망하진 말게. 살아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것이니까.

▼무엇이 진보의 가치겠나▼

모두가 헛된 것이라면서요?

그거야 늙은이의 푸념이고 젊은 날에는 하루하루를 허비해선 안 되지.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 같아. 아니면 너무 편하고 쉽게 살려는 것도 같고.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과거의 잣대로 오늘을 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잣대라? 사는 데 어제 잣대 다르고 오늘 잣대가 다르던가. 자네들은 걸핏하면 옛날처럼은 못 산다고 하는데 옛날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이 있겠는가. 비록 불의(不義)에 눈 감고 부정(不正)에 타협하며 살아왔다고 한들 그들이 일하고 생산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노력하고 희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늘이 만들어졌겠는가.

하지만 부끄러운 삶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존재하고 생활해 왔다는 것만으로 지난날의 잘못이 모두 용서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존재하고 생활해 왔다는 것만이라고? 조금 전에 나는 존재하는 것의 팔 할이 고통이라고 말했네. 그렇다면 팔 할의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존재와 생활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내 가족 먹이고 내 새끼 공부시키고 그래서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욕구가 바로 지난날의 생활이었다면 누군들 그것을 가볍다고 말할 수 있겠나.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입니까? 무엇이 바른 역사입니까?

우리 닭들이 살코기와 달걀을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을 옳다 그르다, 잘라 말할 수 있는가. 생(生)에는 단지 옳고 그름으로 양분(兩分)할 수 없는 너무 많은 부분들이 있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迷路)에서 어느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이라고 길잡이를 하겠는가. 역사란 어쩌면 그렇게 저질러진 숱한 시행착오의 집합일 수 있어. 다행인 것은 때로 돌아가고, 때로 거슬러가더라도 역사란 결국 가야할 제 길을 찾아 간다는 것이지. 그런 믿음이야말로 진보의 가치가 아니겠나.

믿음이 진보의 가치라고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행동으로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가치를 이뤄낼 때 그것이 진보가 아닌가요?

오늘은 내일의 어제일세. 어제와 오늘의 생활이 누적된 것이 역사라면 그것을 어떻게 단숨에 단절하고 청산할 수 있겠나. 열정은 아름답지만 모든 것을 태우는 불로는 역사를 이룰 수 없어. 세월에 겹겹이 쌓인 생활의 흔적들은 없애려 한다고 없애지는 게 아니야. 연민(憐憫)의 손길로 조심스럽게 닦아내야 해. 그래야 얼룩이 조용히 지워지고 또 다른 상처를 남기지 않네.

▼너무 조급해 말게▼

어느 세월에요?

너무 조급해 말게. 역사란 진보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반성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패자(敗者)가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안다면, 서두를 필요가 무에 있겠나. 인내와 겸허함으로 차근차근 한걸음씩 걸어가면 되는 게야. 우리가 해내야 하고,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독선(獨善)과 오만(傲慢)으로는 세상만 시끄럽게 할 뿐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네.

자, 이제 그만 돌아가 자네가 해야 할 일부터 하게. 해가 벌써 중천에 떴거늘.

전진우 논설위원 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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