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병든 한국사회 ‘용서’로 치유를”

  • 입력 2004년 12월 30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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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최근 인도 다람살라를 찾아가 달라이 라마(오른쪽)를 친견하며 합장하고 있다. 가운데는 달라이 라마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한국인 청전 스님. -사진제공=이시형 박사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최근 인도 다람살라를 찾아가 달라이 라마(오른쪽)를 친견하며 합장하고 있다. 가운데는 달라이 라마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한국인 청전 스님. -사진제공=이시형 박사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달라이 라마가 중국계 캐나다 학자 빅터 챈과 함께 쓴 ‘용서’(오래된 미래)가 9월 첫선을 보인 후 20만 부가 넘게 팔리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용서와 성찰을 강조하는 달라이 라마의 목소리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올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그의 방한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불교계는 내년 봄 그의 방한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그에 앞서 올해 인도 다람살라를 찾아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돌아온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의 ‘친견기(親見記)’를 싣는다.

스무 시간 버스길, 한밤중 인도 다람살라의 찬바람이 뼛속을 파고든다. 겨우 찬물에 세수를 마치고 새벽 5시 청전 스님을 따라 달라이 라마 숙소로 향했다. 접견실, 긴장이 되었다.

이윽고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존자(尊者)가 들어선다. 옆에 선 이의 코를 잡아당겨 좌중을 웃긴다. 분위기가 당장 부드러워졌다. 몸에 젖은 겸손, 결코 거만을 위장한 겸손이 아니었다. 그리고 존자 특유의 웃음, 말이 필요 없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난 세계의 지성과 과학자들을 대신해 고맙다는 인사부터 드렸다. 왜냐하면 그는 2년마다 미국 하버드대, MIT 첨단 뇌 과학자들과의 심층 면담에 응할 뿐 아니라 자신을 실험 재료로 기꺼이 내놓곤 하기 때문이다. 혈액 검사는 물론이고 뇌파 등 온갖 뇌 검사를 실시하게 한다. 결과는 과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평소 생활에도, 깊은 명상 상태와 똑같은 소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이윽고 1990년대 중반, 이들 첨단과학자는 중대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제 명상은 동양의 신비가 아니라 증명된 과학이다.’ 이걸 계기로, 증거 없인 믿지 않는 미국인들 사이에 명상 붐이 일기 시작했다. 마돈나, 리처드 기어 등 할리우드 스타들을 비롯해 변호사 의사 등 지식층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점심시간, 미국 공원에서 조깅으로 바쁘게 달리던 발걸음들이 이제 조용한 명상으로 바뀐 것이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이, 더 빨리…그래서 우리가 얻은 게 뭐냐. 20세기를 풍미했던 경쟁문화에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세계는 빠름에서 느림으로, 동(動)에서 정(靜)으로, 경쟁에서 상생으로 의식의 대전환이 명상과 함께 일어나게 된다. 그간 한국에선 명상이라면 절에서 스님들이 하는 수양쯤으로 여겨 왔지만 최근 들어 일반에게도 조용히 붐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인의 조급증에서 비롯된다. 세계 최악의 부실 공사, 안전사고, 교통질서만인가. 걸핏하면 폭력이다. 너무 급하고 거칠고 격하다. 이러한 분노 반응이 한국 사회 정신병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타협도 화해도 없다. 끝까지 간다. 저만치 낭떠러지가 보이는 데도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조급증은 개인의 건강에도 치명타를 안겨 준다. 분노 반응은 대뇌의 분노 호르몬을 분비토록 해 교감신경의 흥분 등 가장 악질적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이게 세계 최고의 뇌졸중을 비롯하여 암, 심장병, 당뇨 등 소위 생활습관병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많이 먹는 습관, 운동하지 않는 습관만 고치면 되는 줄 알지만 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밝고 여유 있는 긍정적 마음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제 우리도 평균 수명 80세에 육박하는 장수국이다. 하지만 건강 장수는 아직도 62세로 세계 중하위권이다. 그만큼 건강하지 못한 노인이 많다는 뜻이다.

다시 달라이 라마로 돌아가자. 쫓겨 사는 망명정부의 수반이요 초라한 승려인 그에게 어떤 매력이 있기에 그토록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걸까. 사흘간 계속된 보리 행론 강론에도 5000∼6000명의 외국 청중으로 빈 자리가 없었다. 온 세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그 인기의 비결이 뭘까?

그의 깊은 신앙심이나 사상만이 아니다. 그보단 오히려 그의 인간적 매력 때문이다. 아무 거침이 없다. 솔직하고 천진난만하다. 강론은 물 흐르듯, 그건 한 편의 시다. 자신도 강론에 만족했던지 단상의 승려들에게 내 잘했지? 하고 뽐내는 통에 장내는 폭소 마당, 자신도 킥킥거리며 웃는다. 아무런 가식도 꾸밈도 없는 짓궂은 악동 그대로다. 그러다가도 부처님의 자비심을 읽으며 너무도 감사하고 감동한 나머지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대는 그의 모습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에게 난 아주 빠져 버렸다. 용서만큼 절실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또 있을까. 그 어렵고 힘든 망명생활에도 그의 웃음을 앗아갈 수 없는 건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깊은 명상에 잠긴 세기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존자가 오늘 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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