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구호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왜곡되기 십상 ”

  • 입력 2004년 11월 16일 18시 46분


코멘트
“세속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또 다른 힘을 꺾기 위해 시도하는 ‘역사 바로 세우기’는 또 하나의 거짓과 왜곡으로 머무르기 십상이다.”

안경환(安京煥·56·사진) 서울대 법대 교수가 다음 주 발간되는 계간지 ‘당대비평’ 겨울호에 쓴 권두 에세이 ‘기억과 용서’에서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되, 용서할 것은 용서하자”며 현 정부 여당이 추진하는 과거사 진상 규명작업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안 교수는 “인간사에 진실은 없다. 오로지 사실이 있을 따름이다. 사실을 두고 진실과 거짓이 자리다툼을 벌인다”며 “누가 누구를 평가하는가.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이 과거인의 행적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가. 누구의 자료에 의해, 무엇을 근거로, 어떤 절차에 의해 조사하고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지성과 양심의 상징이던 잡지 ‘사상계’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업적을 추모하는 행사를 벌인 적이 있다”며 “(만약 과거사를 규명한다면) 과(過)와 더불어 공(功)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란한 구호와 함께 ‘역사 바로 세우기’가 거듭됐지만 무엇이 바로잡혔고, 무엇이 바로 세워졌는가”라며 “(제대로 되지 못한 이유는) 권력투쟁의 목적으로 등장했다 물러났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안 교수는 이어 지금 한국에서는 균형과 이성, 교양, 지성을 찾기 힘들어졌다고 밝혔다. 그는 △젊은 학자가 남한에 정의로운 사회가 건설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를 광복 직후 친일파 숙청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일 △기업의 존립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명문대 경제학과 학생의 80%가 즉시 ‘사회 환원’이라고 답했다는 일 등을 들며 “수많은 논리적 단계를 생략한 채 곧바로 이상적 결론에 뛰어드는 이들의 직선적 사고가 무섭기 짝이 없다”고 탄식했다.

안 교수는 “우리도 이제는 과거사의 죄인들을 사면해 주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 과거사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면 어떨까”라고 물은 뒤 “우리의 눈이 과거에 고정되어 있는 한 미래를 향해 내처 달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