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당신 부친이 ‘지난 여름’ 한 일은?

  • 입력 2004년 9월 5일 18시 55분


코멘트

사학을 전공한 기자는 대학 첫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교수님은 당시 몇몇 학생에게 역사, 특히 국사학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임진왜란과 원균의 활동에 대해 공부하고 싶습니다.”(학생)

“그래? 이유가 뭐죠?”(교수)

“원균은 제 조상인데 이순신 장군에 가려 역사적 진실이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학생)

그 학생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학도의 자세가 아니라는 말씀이었다.

갑자기 그 일화가 떠오른 것은 요즘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이순신 장군이 재조명되면서 원균 장군도 새롭게 해석되는 데다 정치권에선 과거사 규명 논란이 한창인 때문이다.

우리 근현대사를 다시 돌아보고 왜곡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만 최근의 과거사 규명 문제는 어쩐지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학생의 나이브한 역사인식을 연상시킨다.

물론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분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과거사 규명 작업이 정치권에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부친의 친일 의혹과 관련해 사퇴한 것은 거짓말과 관련한 도덕성이 문제였던 만큼 그렇다 치자.

같은 당의 두 명의 여성의원 중 한 명이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군 출신”이라고 자랑한 지 얼마 안 돼 또 다른 한 명은 “우리 아버지는 일본군 헌병”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조부가 독립군 출신이어서 출신 성분이 좋다는 말인가, 아니면 부친의 친일을 고백했으니 “이번엔 네 차례”라는 얘기인가.

이런 분위기라면 온 국민이 나서 ‘아버지가 지난여름에 한 일’에 대한 조사에라도 나서야할 판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의 친일 논란, 이념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대다수 민초의 삶이란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말 그대로 풀뿌리처럼 끈질기게 ‘생존’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념도 생존의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반면에 주변 국가들은 어떤가. 중국은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나의 과거, 너의 과거를 캐느라 여념이 없다.

역사는 늘 새롭게 씌어져야만 하고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그 해석은 권력의 몫이 아니다. 좌익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가 가능한 것은 대통령이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좌익 행적도 독립운동의 수단이었음을 입증하는 많은 연구가 축적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돌이켜보면 무릇 권력이 역사를 건드리고자 했을 때는 늘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가 일어나곤 했다.

역사가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며 언제나 시대정신을 담은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과거사 진상 규명 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매듭지어질 것이다. 이왕 관련 법안이 처리된다면 ‘진상 규명 작업’은 전문가나 학자들이 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성희 교육생활팀 팀장 shch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