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주말시대]웰빙휴가/소설가 성석제씨의 휴가 제안

  • 입력 2004년 7월 1일 20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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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름, 미국에 갔을 때였다. 휴가철이라 뉴욕 근처에 살고 있는 몇 가족이 함께 어울려 휴가를 가기에 어슬렁어슬렁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꽤 큰 규모의 휴양지였는데 호수와 숲 주변 곳곳에 방갈로와 캠프 사이트, 캠핑카촌이 있었다. 이불과 밥솥까지 준비해온 우리 일행은 방갈로를 잡자마자 얼음 통에 재워온 고기를 구워먹을 준비를 했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아이들을 책임지기로 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굽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유학 생활과 문화, 예술, 언어·신화학 등 다양했고 때로 논쟁이 치열해지기도 했는데 평소에 한국말을 못하는 스트레스를 푸는 게 목적인 양 느껴졌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의 일정이 이어졌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이를 보든가 잠깐씩 산책을 하는 중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구경하게 되었다. 물론 물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많았고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늘에 앉거나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었다. 나는 휴가까지 와서 책을 보고 있는가, 하고 좀 한심해 하는 한편으로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했다. 유학 중인 선배 말로는 고전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오만과 편견’ 같은 것. 내 눈에는 스티븐 킹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전기 같은 것도 보였다. 은퇴하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캠핑카촌 근처로 갈수록 책을 읽는 사람의 수도 늘어났고 책의 종류도 셰익스피어나 니체의 책까지 다양해졌다. 은퇴한 사람들은 젊은 시절 한 번 읽고 나서 시간이 없어 일생 동안 별러 왔던 책을 지금 읽고 있는 것이라고 선배가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휴가지에서 책 읽는 사람이 적은가. 여유가 없고 바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휴가를 가서도 하나라도 더 보려 하고 남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옮겨 다니고(특히 이런 방면으로는 지고는 못 살고) 하나라도 더 굽고 더 먹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노름도 하는데 따든 잃든 일상에서 아등바등하는 모습의 연장이며 반복이다. 요즘 숙소들은 인터넷이며 텔레비전은 기본이니 아이들은 그곳에 맡겨 버린다. 틈틈이 휴대전화로 주가를 조회해야 하고 뉴스를 모르고서는 남에게 뒤처진 것 같다. 차에서도 TV드라마의 대사가 흘러나오는 세상이다. 왜 그렇게 멀리 가서 불편하게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바쁘고 규칙적이고 경쟁적인 일상에서 벗어나서, 정말 잠시라도 인연을 끊고 쉬러 왔다면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일을 하는 게 정답이겠다. 이를테면 고요한 숲 속에 방심한 채 멀거니 앉아 있는 것같이. 이런 사람을 슬며시, 그러면서도 눈치 빠르게 도와주는 존재가 책이다.

책은 일상과 휴가 사이의 휴전선이다. 동시에 재미가 들어차 있고 역사와 전통이 있는 장벽이기도 하다. 더욱 좋은 점은 싸고 편리하면서 용도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숲 속에 들어가서 맑은 공기 속에 자리라도 깔고 누워서 책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베개로 쓸 수도 있는 게 책이다. 심각하게 몰입할 수도 있으며 그저 손이 심심하지 않도록 들고 다닐 수도 있다. 적막과 고적의 표상이면서 대화 상대이기도 한 책. 책을 읽고 있는 낯모를 사람에 대한 연대감과 믿음을 가지게 해주는 책.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이따금 넘겨다보면서 해변의 의자에 앉아 펴드는 책. 주스나 차를 마시면서 책장을 넘길 때 그 무슨 깨달음이 없더라도, 삶의 지침을 못 얻는다 해도, 부자가 되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도 조용하고 안전하게, 잘 쉬었다고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휴가철마다 열 권 스무 권씩 대하소설이며 무협지를 껴안고 방에 처박히는 사람을 나는 아는데 그렇게 하기 시작한 뒤부터 그는 멀리 쉬러 가서 제대로 쉬고 온 사람의 얼굴이 되었더랬다. 독한 사람들은 책만 가지고도 휴가를 즐길 수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저 일요일에 혼자 책과 김밥을 들고 숲에 가는 정도이다. 얕은 산을 슬슬 오르락내리락하다 적당한 의자에 벌렁 드러누워서 책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주인이라는 게 느껴진다, 적어도 내 생에서는.

▽성석제씨가 권하는 책

‘십팔사략’ (고우영 지음)

‘임꺽정’ (홍명희 지음)

‘초콜릿우체국’ (황경신 지음)

‘독재자가이드’ (앙드레 드 기욤 지음)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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