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6월 20일 18시 5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六·二五사변이 제四주년이 되었다는 오늘날에 나는 이날을 기념하느니보다 오히려 잊어버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 외국의 무력을 빌려가지고 난리를 꾸며서 자상잔멸을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참으로 욕되고 부끄러워서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것입니다. (…) 다 밀고 올라가서 통일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했으나 국제관계로 인연해서 지금까지 끌려내려 온 것입니다. (…) 연합국가에 요청하고자 하는 것은 불원한 장래에 큰 화근을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다 함께 일어나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적국을 정복시킴으로써 자유세계의 목적을 성공케 하자는 것입니다.”<1954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에서>
▼李대통령 ‘북진통일’ 내주고 ‘안보’ 받고▼
▶연재물 리스트로 바로가기6·25전쟁 휴전 이후 처음 맞이한 ‘6·25 기념식’. 이승만 대통령은 위 기사와 같이 기념사에서 북진통일에 대한 욕심을 다시 한번 내비쳤다. 6·25 이전에도 그는 1949년 미국 육군부 장관과의 회담에서 한국군이 증강되면 곧 북진하겠다고 말했고 1950년 3·1절 기념사에서도 북진에 필요한 비행기 군함 탱크를 달라고 미국측에 요구하는 등 북진 의지를 감추지 않았었다.
그러나 하루 만에 평양이나 원산을 점령하겠다던 장담과 달리 막상 전쟁이 터지자 사흘 만에 서울을 내줬으니 그의 북진통일 주장이 얼마나 허구였는지 알 만하다. 이 대통령은 전쟁 중 뒤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이제 38선은 자연 해소됐다”고 선언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한때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해 그의 꿈이 이뤄지는 듯하기도 했으나 중국군 개입으로 이 역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휴전 이후 그 현실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1954년 11월 서명한 ‘한미합의의사록’은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책임지는 한 그 군대(한국군)를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둔다’는 규정으로 북진통일을 제도적으로 묶어버렸던 것.
그러나 남한은 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통해 국가안보를 약속받았다. 이 점에서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나름대로 바라던 외교적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군 감축을 늦추거나 감축에 따른 보상 및 안전보장을 얻어내기 위해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는 수단이었다는 분석이다.
주한미군의 감축 논의를 지켜보며 “무조건 미국 바짓가랑이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고 짐짓 태평스러워 하는 요즘 세태에 비하면 미군을 붙잡기 위해 ‘벼랑 끝 외교’까지 동원했던 반세기 전의 상황이 격세지감으로 다가온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