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6월 넷째주

  • 입력 2004년 6월 20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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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31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국군 평양 입성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대한민국 정부기록사진집 자료사진
1950년 10월 31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국군 평양 입성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대한민국 정부기록사진집 자료사진
▼새 기운과 새 용맹으로 永久한 安全을 期하자▼

“六·二五사변이 제四주년이 되었다는 오늘날에 나는 이날을 기념하느니보다 오히려 잊어버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 외국의 무력을 빌려가지고 난리를 꾸며서 자상잔멸을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참으로 욕되고 부끄러워서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것입니다. (…) 다 밀고 올라가서 통일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했으나 국제관계로 인연해서 지금까지 끌려내려 온 것입니다. (…) 연합국가에 요청하고자 하는 것은 불원한 장래에 큰 화근을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다 함께 일어나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적국을 정복시킴으로써 자유세계의 목적을 성공케 하자는 것입니다.”<1954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에서>

▼李대통령 ‘북진통일’ 내주고 ‘안보’ 받고▼

▶연재물 리스트로 바로가기6·25전쟁 휴전 이후 처음 맞이한 ‘6·25 기념식’. 이승만 대통령은 위 기사와 같이 기념사에서 북진통일에 대한 욕심을 다시 한번 내비쳤다. 6·25 이전에도 그는 1949년 미국 육군부 장관과의 회담에서 한국군이 증강되면 곧 북진하겠다고 말했고 1950년 3·1절 기념사에서도 북진에 필요한 비행기 군함 탱크를 달라고 미국측에 요구하는 등 북진 의지를 감추지 않았었다.

그러나 하루 만에 평양이나 원산을 점령하겠다던 장담과 달리 막상 전쟁이 터지자 사흘 만에 서울을 내줬으니 그의 북진통일 주장이 얼마나 허구였는지 알 만하다. 이 대통령은 전쟁 중 뒤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이제 38선은 자연 해소됐다”고 선언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한때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해 그의 꿈이 이뤄지는 듯하기도 했으나 중국군 개입으로 이 역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휴전 이후 그 현실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1954년 11월 서명한 ‘한미합의의사록’은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책임지는 한 그 군대(한국군)를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둔다’는 규정으로 북진통일을 제도적으로 묶어버렸던 것.

그러나 남한은 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통해 국가안보를 약속받았다. 이 점에서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나름대로 바라던 외교적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군 감축을 늦추거나 감축에 따른 보상 및 안전보장을 얻어내기 위해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는 수단이었다는 분석이다.

주한미군의 감축 논의를 지켜보며 “무조건 미국 바짓가랑이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고 짐짓 태평스러워 하는 요즘 세태에 비하면 미군을 붙잡기 위해 ‘벼랑 끝 외교’까지 동원했던 반세기 전의 상황이 격세지감으로 다가온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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