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김영기/‘국악의 정신’ 가르쳐준 아버지

  • 입력 2004년 3월 24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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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은 실이 되고….’ 봄날의 정경과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표현한 가곡 ‘이수대엽’이 은은히 들려온다. 이 고운 소리의 실체를 따라온 지 벌써 30년이 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국악에 첫발을 디뎠다. 시험을 치러 국악중학교에 입학하고 6년 후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번도 ‘보통’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나 자신을 비교한 적이 없었다. 비교할 틈이 없었다. 먼저 국악의 길을 걷던 아버지의 스케줄에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따랐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 고 김월하 선생의 첫 전수자가 되면서부터 아버지는 철저하게 나의 시간표를 관리하셨다. 등교 전 집에서 1시간, 방과 후 스승 댁에서 3시간. 고된 연습 때문에 집에 오면 잠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사춘기였기에 가끔 요령을 피우고 소설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이내 아버지의 무서운 눈빛과 질책이 떨어졌다. 서러움에 혼자 눈물도 많이 흘렸다.

나의 잠재된 불만은 대학 때 폭발했다. 먼저 국악의 비전에 회의가 들었다. 사회적 대우나 인식이 너무 낮았다. ‘우리 것이기에 소중하다’는 것은 그저 말뿐이었다. 지루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가곡 한 곡에 가사는 겨우 45자인데 10분 넘게 부른다. 선비의 지조와 단아함이 담겼다지만 자유로움에 들뜬 대학 시절에 그 의미가 다가올 리 없었다.

‘아버지는 왜 나를 이런 길로 이끌었을까.’ 막연한 자의식은 반항으로 이어졌다. 당신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 즉 기능만 익히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국악의 ‘정신’과 ‘철학’이 계발되지 않았다고 늘 한탄하셨다. 어린 시절 내게 특수교육을 시킨 것도 기능을 빨리 마스터하고 ‘정신’을 익히라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기능인에 머물렀다.

1983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 국악 수업이 개설됐다. 아버지가 그곳 음대 학장과 만나 담판을 짓고 만들었는데, 교수요원 1명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다. 당연히 내가 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냉정했다. 공부와 연습을 게을리 했다며 다른 사람을 보내셨다.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거기서 단절됐다.

묘하게도 변화는 나 자신에서 비롯됐다. 결혼하고 아이들 기르며 직장생활을 하다 30대 중반에 이르자 강한 회의가 들었다. 어린 시절의 초발심이 떠올랐다. 스승의 소리가 예전과 다르게 들리고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네 소리가 마치 내가 부르는 거 같다. 어쩜 그리 똑같냐”고 하셨다. 그날 너무 기뻐 잠을 못 이루며 가곡이 나의 천직임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한 사고를 확장하고 싶었다. 늦었지만 대학원에 진학했다. 직장생활과 집안일이 있었지만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43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인간문화재라는 부담스러운 칭호를 받았다. 어깨가 무겁다. 후배들에게 ‘단순히 기능인에 머물지 말라’고 충고하는 모습은 바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임을 깨닫는다.

명절 때나 겨우 아버지를 뵌다. 말씀은 여전히 똑같다. “공부 더 해라.” 이제는 나도 진심으로 대답한다. “네.”

김영기 중요무형문화재 30호 ‘가곡’ 예능보유자

KBS 국악관현악단 부수석

약력-1958년생, 서울대 음대 국악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월하여창가곡보존회장, 서울대 영남대 국악예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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