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추기경 헌정 앨범

  • 입력 2004년 3월 18일 19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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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인연으로 종종 남이 쓴 학위논문을 받아 보게 된다. 대부분 전문 분야의 석박사 논문이어서 ‘보관용’에 그치곤 하지만 논문 앞부분의 ‘헌정사(獻呈辭)’에는 한 번쯤 눈길이 간다. 은사와 부모, 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선후배 동료에게 보내는 감사의 글이다. 학위 과정 중에 불현듯 세상을 떠난 시골의 부친과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불철주야 고생한 아내에게 바치는 글을 읽으면 가슴찡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유사 이래 수많은 시 소설 음악 미술작품의 상당수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에게 바쳐졌다. 종교의 경전 또한 신에 대한 경외와 찬사, 그리고 헌시(獻詩)를 집대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시성(詩聖) 타고르의 노벨상 수상 시집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였고, ‘용비어천가’는 왕실에 헌정된 국책 송축가였다. 에릭 크랩튼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파트에서 추락 사고로 숨진 어린 아들을 위해 ‘Wonderful Tonight’과 ‘Tears In Heaven’을 작곡했다.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대한민국 모든 남편들이 아내에게 바친 ‘속죄의 노래’였다.

▷베토벤은 민중의 구원자로 생각했던 나폴레옹을 위해 교향곡 제3번 ‘영웅’을 작곡했다가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프랑스로 보내려했던 악보의 겉장을 찢어 버렸고, 사랑하는 여 제자를 위해 ‘월광(月光)’을 작곡했다. 브람스는 흠모하던 슈만의 부인 클라라에게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 3중주곡을, 멘델스존은 친구이자 후원자인 다비드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을 바쳤다. 감미롭고 애잔한 쇼팽의 ‘이별곡’은 출세 후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연인에게 바친 즉흥 연주곡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국내에서는 신중현 산울림 김광석 등 시대를 앞서 간 뮤지션에 대한 헌정 앨범이 발매된 바 있다. 하지만 원로 작곡가 정풍송씨(62)가 엊그제 ‘나라의 어른’을 수구세력으로 매도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헌정 음반 ‘김수환 추기경님께’를 낸 것은 이와는 경우가 다르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정씨의 충정과 노고를 위로하는 한편, 가수들이 인기 관리와 인터넷 테러 등을 이유로 앨범 취입을 사양해 작곡자가 직접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에 이르면 새삼 시대의 현실이 서글퍼진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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