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송우혜씨, `불멸`저자 김탁환교수 반론에 재반박

  • 입력 2004년 2월 2일 19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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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소재로 한 김탁환 한남대 교수(36·문예창작과)의 소설 ‘불멸’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소설가 송우혜씨(57)가 ‘불멸’에 대해 비판한 글을 작가 김 교수가 반박하자 이에 대해 송씨가 다시 반박하는 글을 2일 보내왔다.

필자가 김 교수의 ‘불멸’을 문제 삼는 것은 사실(史實)과 다른 설정에다 의도적인 역사 왜곡까지 겹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교수의 반론은 지적된 문제점을 아예 동문서답으로 비켜간 부정직한 것이어서 유감스럽다.

먼저, 임진년 4월 29일 남해현 성의 관청 창고 방화는 이순신 자신이 세상에 널리 알린 사건이다. 그런데도 김 교수는 ‘불멸’에서 역사를 왜곡하여 이순신이 부하들과 짜고 방화한 뒤 세상을 속이려고 “방화를 한 건 왜적의 간자(간첩)”라는 거짓말을 퍼뜨렸다가 원균과 그의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왜놈보다 더 비열하다”는 욕을 먹고 폭행까지 당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불멸’ 2권 44∼122쪽). 나는 바로 그 점을 문제 삼은 것인데, 김 교수는 내가 ‘방화’의 정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양 호도하며 넘어갔다.

정유년 2월 이순신 함대는 부산 진공작전을 펼쳤었다. 그러나 김 교수가 ‘이순신은 두려워서 끝내 부산 바다에 진격하지 못했고 그 죄로 체포되었다’(‘불멸’ 4권 99∼126쪽)고 주장한 것이 쟁점이었다. 그런데도 김 교수는 내가 거론하지도 않은 ‘이순신의 삭탈관직 이유’에 대한 해석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느니 운운하며 쟁점에서 도피했다.

또한 김 교수가 임진년 4월 14일 원균이 적선 30여척을 격파했다고 주장했으나 “개정판에서는 이 날짜를 며칠 뒤로 옮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오류가 역사적 사실이 되지는 않는다.

김 교수의 ‘불멸’이 지닌 최대의 문제점은 철저한 이순신 폄훼 구조다. 무엇이든 원균에게 불리한 건 이순신 탓이고, 이순신이 잘한 건 원균의 덕으로 돼 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 수군을 궤멸시키고” 있는 탓에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죽었고(‘불멸’ 4권 135쪽), 원균이 죽은 뒤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거둔 것은 전날 밤 꿈에 “원균처럼 싸우라”는 계시를 받고 그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불멸’ 4권 232쪽).

이순신이 “나는 원 통제사를 평생 흠모하며 존경하였느니라. 임진년 승리도 절반은 그의 공이다”라고 원균을 찬양하는가 하면(‘불멸’ 4권 162쪽), 기세등등한 원균이 쓰러진 이순신의 백발성성한 머리를 틀어쥐고 개처럼 질질 끌고 운주당 섬돌 위로 올라가도 이순신은 “꺼억 꺼어억” 가래 끓는 소리를 낼 뿐 전혀 반항하지 못한다(‘불멸’ 3권 340쪽).

더구나 명량대첩 뒤 이순신의 부하들은 ‘역모’를 꾸미면서 이순신을 옹위하여 거병할 준비를 하고 이순신도 거사를 고려하며 “휘청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서인의 거두 윤두수(이순신 폄훼에 앞장섰던 인물임)가 이순신에게 서찰을 보내어 ‘왕실과 만백성을 위해’ 전사(戰死)를 가장하여 자살함으로써 ‘불멸의 길’을 가라고 강력하게 권했고, 그 권고를 받아들인 결과 이순신은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불멸’ 4권 329∼373쪽)

기가 막힌다. 1980년대에 돌연 시작된 ‘이순신 죽이기’의 흐름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순신이 본래 비루한 인간이었다면 비루하게 그리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이 낳은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존재 중 하나로, 적들마저 존경했던 분이다. 이처럼 부당한 모욕과 폄훼를 마구 가해도 되는 분이 아니다.

송우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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