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올드 보이'…도대체 왜 날 가둔거야

  • 입력 2003년 11월 18일 17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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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판타지를 야수적이면서도 미학적으로 그려낸 영화 ‘올드 보이’. 복수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는 것은 결국 ‘왜?’라는 질문 뿐이다. 사진제공 쇼이스트
복수 판타지를 야수적이면서도 미학적으로 그려낸 영화 ‘올드 보이’. 복수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는 것은 결국 ‘왜?’라는 질문 뿐이다. 사진제공 쇼이스트
‘올드 보이’는 이상한 영화다. 야수적이고 동물적인 이미지와 매끈하고 세련된 스타일이 충돌하면서 파장이 증폭된다. 내용이 뜨겁고 잔혹할수록 스타일은 그만큼 쿨하고 세련되어지는 것이다. 복수의 원시성을 담은 주인공의 거친 레게 머리, 묵시론적 느낌을 주는 검은 양복, 생니를 뽑는 복수의 도구인 장도리는 둔탁하고 무지막지하지만 그 자체로 독특한 영화적 미학이다.

‘올드 보이’는 리얼리즘을 표방하지만 사실 판타지적 영화다. 영화 속 복수는 현재나 미래적이지 않으며 제목처럼 아주 과거적이고 신화적이다. 지독하게 얽힌 복수와 또 다른 복수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남는 것은 ‘왜?’ 라는 외마디 질문. 이에 대한 해답은 끔찍하고 엽기적이지만, 그래서 인간은 슬픈 동물일 수밖에 없다.

파출소에서 가끔 난동이나 부리는 희망 없는 샐러리맨 오대수(최민식)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납치돼 8평 독방에 15년 동안 감금된다.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하는 한편 그는 자신이 감금당할 만한 일을 저질렀는지 반추하기 위해 ‘악행의 자서전’을 쓴다. 15년 만에 풀려난 오대수는 마침내 자신을 가둔 사람이 이우진(유지태)임을 밝혀낸다. 분노에 사로잡힌 오대수는 우진을 만나지만, 우진은 5일 안에 자신이 가둔 이유를 밝혀내면 스스로 죽어주겠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은 거칠고 성긴 화면 속에 한 편의 어둡고 숙명적인 그리스 비극을 그려 넣었다. 오대수가 ‘복수는 건강에 좋다. 하지만 복수가 다 이뤄지면 어떨까. 그러면 숨어있는 복수가 찾아오진 않을까’하고 잠언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슬픈 희곡의 대사를 듣는 듯하다. “그렇다” “아니다” 스스로 짧게 대답하면서 유머를 촉발하는 대목들은 심각한 내러티브 속에서 역설적으로 발랄한 영화적 리듬을 빚어낸다.

주인공의 대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공사장의 소음과 빗소리, 불안감을 자극하는 들고 찍기(핸드헬드) 기법은 고다르의 영화처럼 현실의 부조리함과 난폭함을 극대화시키지만 아울러 보다 장르적으로 다듬어졌다. 감금방에서 오대수가 15년 동안 먹은 군만두와 TV에서 흘러나오는 민해경의 ‘보고 싶은 얼굴’은 일상의 지긋지긋함을 상징하는 도구이자 주도면밀하게 장치된 복선들이다.

클라이맥스에서 4분간 대본없이 독백을 토해낸 최민식은 복수심에 사무친 어두운 얼굴로 영화적이면서도 연극적인, 잊지 못할 연기를 펼쳤다. 유지태는 존재론이 갖는 슬픔과 냉소가 동거하는 복잡한 눈빛을 보여줬다. 오대수가 뜨거운 사랑에 빠지는 어린 여자 ‘미도’ 역의 강혜정은 “내가 민해경의 ‘보고 싶은 얼굴’을 부르면 그냥 날 덮쳐버려”라고 말하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젖꼭지를 보여준다. 21일 개봉. 18세 이상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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