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글 밤엔 술…팔순의 차범석 예술원 회장 '옥단어!' 출간

  • 입력 2003년 11월 14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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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팔순을 맞은 차범석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여전히 연극 현장을 지키는 현역 작가인 그는 '죽는 날까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김미옥기자
15일 팔순을 맞은 차범석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여전히 연극 현장을 지키는 현역 작가인 그는 '죽는 날까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김미옥기자
그를 보면 ‘팔순 노인’이라는 말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15일로 80세 생일을 맞은 극작가 차범석씨(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물론 얼굴의 주름이야 감출 수 없지만 꼿꼿한 걸음걸이와 낭랑한 목소리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이제 막 장년에 접어든 활동가의 모습이다.

생일을 이틀 앞둔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는 그의 여덟 번째 희곡집 ‘옥단어!’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신작 출간과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각계 인사 4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작가는 작품으로 승부하는 만큼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고 인사말을 했다. 팔순 잔치는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미래의 약속’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그는 여전히 현역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2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예술원 회장실로 그를 찾아갔다. 먼저 문화예술계의 현실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는 얼마 전 이른바 정부의 ‘코드 인사’에 항의하는 ‘연극인 100인 성명’에 참여한 바 있다.

“그 뒤 이런저런 말이 많습디다. 제가 걱정한 것은 문화계의 갈등입니다. 특정한 조직에 속한 사람만을 기관장으로 등용하면 문화예술계 전반의 화합이 깨질 수 있다는 뜻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총이니 민예총이니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고, 어느 한 편에 선 것도 아닙니다. 저를 포함한 문화계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조직과는 관계가 없어요.”

이내 후배들 걱정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지금도 그는 한달에 10번 정도 연극 공연장을 찾는다. 일부 젊은 연극인들이 충분한 훈련이나 기본적인 공부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연극부터 올리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공연을 보다보면 가끔 ‘과연 이 연극이 티켓값 2만∼3만원만큼의 가치가 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연기도 그렇고 희곡도 그래요. 희곡은 잉태기간이 필요합니다. 저의 경우 ‘산불’은 10년, ‘옥단어!’는 7년 구상한 뒤에 썼어요.”

뒷짐 진 원로가 아니라 현역 작가로서 하는 지적이란 점에서 더욱 신랄하다. 근황을 묻자 의욕이 넘친다.

“바쁘지요. 매일 술 마셔야죠, 친구 만나 놀아야죠, 허허…. 그건 저녁 이야기고 낮에는 당연히 글을 씁니다. 요즘은 ‘악어새’의 초고를 다듬고 있어요. ‘불섬’이란 작품도 쓸 예정입니다. 지금 구상 중인 것도 5, 6편 됩니다. 평생 글을 썼지만 변변한 것이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걸 쓰려고요. 작가는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죽을 때까지 쓰는 겁니다.”

‘옥단어!’는 12월 12일부터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상연된다(연출 이윤택). ‘옥단어!’는 ‘옥단아!’라고 부르는 말을 전라도 사투리로 표기한 것. ‘옥단’은 그의 소년 시절 고향 목포에 살았던 실제 인물. 일자무식으로 날품팔이로 생계를 꾸렸지만 순박하고 정이 많았던 여자다.

“요즘엔 그처럼 순수하고 꾸미지 않은 삶이 없어요. 휴머니즘이 상실된 사회라 옥단이의 삶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옥단을 떠올리면서 그의 눈빛이 더욱 맑아졌다. 팔순의 원로 차범석의 모습은 사라지고, 1930년대 목포 평화극장을 드나들며 ‘연극 인생’을 꿈꾸었던 한 소년이 거기에 있었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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