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딱딱한 미술 답답한 현실 부딪쳐봐!…이동기 '크래쉬展'

  • 입력 2003년 9월 4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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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 ‘록 밴드 2001’ 앞에 선 화가 이동기.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아토마우스가 록밴드 기타리스트다. 그는 이처럼 다양한 만화적 이미지를 차용해 가벼움과 무거움, 실제와 허구, 현실과 꿈의 충돌을 보여 준다. -안철민기자
자신의 작품 ‘록 밴드 2001’ 앞에 선 화가 이동기.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아토마우스가 록밴드 기타리스트다. 그는 이처럼 다양한 만화적 이미지를 차용해 가벼움과 무거움, 실제와 허구, 현실과 꿈의 충돌을 보여 준다. -안철민기자
화가 이동기씨(36) 첫 인상은 의외였다. 말수는 적고 여간해선 우스갯소리도 잘 않는데다 목소리는 중얼거리듯 낮았다. 인간 이동기에게서 느껴지는 무채색의 진지함과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화려한 가벼움은 어떤 지점에서 빚어지고 ‘충돌’ 하는 것일까.

의문의 실마리는 그가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아토마우스’란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기까지의 고민을 들으면서 풀렸다. ‘아토마우스’는 다분히 키치적이고 식상해 보이지만, 실은 격동의 80년대를 캠퍼스에서 보낸 한 386 예술가의 자화상이다.

이씨는 홍익대 미대 86학번. 이즘(ism)과 주장을 앞세웠던 민중미술과 관용과 너그러움이 부족한 고급 모더니즘 미술이 함께 풍미했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여기에 컬러 TV, 비디오, 영화 등 급작스럽게 확대된 대중매체의 세례도 받았다.

거대 담론적 가치들과 일상적 욕망의 폭발을 한꺼번에 경험한 그는 화가로서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미술 작품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면 미술은 진정 몇몇 소수자들만이 향유하는 ‘그들만의 세계’일까, ‘나’로부터 시작되는 일상과 관심은 캔버스라는 햇빛으로 나오기 어려운 것일까. 그는 바깥보다는 내면적 성찰에 몰입했고, 이런 고민은 일상을 보는 그의 시선을 솔직하게 만들었다.

가장 사(私)적인 것이 정치적이라 했던가. 10여년이 지난 오늘, 그가 만들어 낸 만화적 이미지들은 가장 사적인 방식을 통해 현실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사회적 이미지와 캐릭터로 성장했다.

그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변화해 왔다. 초반기 아예 만화의 한 장면을 캔버스에 그대로 옮겼던 ‘도발적’ 방식은 ‘미술관’ 혹은 ‘대형 캔버스’하면 떠 올려지는 이른바, 관람객을 주눅 들게 하는 고급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뒷방에서 땅콩이나 까먹으며 단지 시간을 때우기 위한 그림에 불과한 만화 같은 하위문화도 당당히 주류에 들 수 있다는 대리 만족적 자신감을 심어 놓은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이른바, 고급과 저급, 주류와 비주류의 충돌을 시도했다.

그의 전복(顚覆)은 이제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대표작 아토마우스 연작 시리즈로 오면서 절정에 이른다. 아토마우스는 단순하고 편한 윤곽선과 간단한 형태 그대로 직접적인 호소력을 갖고 다가온다. 라면이나 국수를 먹기도 하고 턱을 괸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거나 하얀 방이나 꽃밭에 홀로 서 있기도 하며, 록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우주공간을 날아다니거나 때론 팔 다리가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현실에 없는 가상의 캐릭터가 때로 지극히 현실적인 메시지들을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이 작가의 의도이건 아니건 간에, 우리 안에 희로애락과 무의식, 환상, 꿈, 오락으로 종횡무진 대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가 최근 들어 천착하고 있는 것은 아예 현실에 있는 장면을 그대로 모사(模寫)하는 다큐적 작업 방식. 이제 그가 만화나 아토마우스 같은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통해 일상과 허구의 충돌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행기 추락이나 교통사고의 순간을 포착해 그리거나 10만 원 권 자기앞수표, 보그 잡지 표지, 대머리 약 광고를 마치 실크 스크린처럼 복제해 내는 듯한 그의 그림은 사실 철저한 손작업으로 이뤄진 것들이다. 대량 복제와 한 장밖에 만들지 않는 손작업이라는 충돌은 기계와 인간, 물질과 영혼 등 다양한 상상력을 이끌어 낸다.

28일까지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은 10여년 넘는 그의 작품 전체를 일관해 볼 수 있는 기회다. 1층의 아토마우스 시리즈와 2층의 다큐 만화작업으로 나눠진 이번 전시의 주제는 가벼움과 무거움, 실제와 허구, 현실과 꿈의 충돌을 보여 온 그의 작업의 주된 방향답게 ‘크래쉬(충돌)’이다. 02-2020-2055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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