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아이템]'폴리테이너' "정치도 연기일 뿐이다"

  • 입력 2003년 9월 4일 16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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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라면 호머 심슨(미국 TV만화 ‘심슨 가족’에 나오는 무능력한 아버지)은 백악관 주인이다.(알란 히검, 영국)”

“철없는 카우보이 같은 정치인들이 깔렸는데 정치인처럼 행동하는 배우가 뭐가 어때서.(토니 소레이스, 미국)”

지난달 6일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출마를 발표하자 며칠 뒤 영국 BBC 방송 인터넷판은 ‘연예인의 정치적 공직 출마는 좋은가’라는 주제로 전 세계 네티즌에게 받은 의견들을 공개했다. 연예인의 정치 입문에 대해 수 백여 건의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따로 내려진 결론은 없었다. 그러나 그 논쟁 속에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인정하는 흐름이 존재했다.

이제 ‘폴리테이너(politainer)’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연예인=폴리테이너

폴리테이너는 정치인(politician)과 연예인(entertainer)을 결합한 말이다. 단순하게는 연예인이거나 연예인이었던 정치인을 뜻한다. 좀 더 뜻을 넓히면 TV 오락 프로그램 등에 출연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인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과 연예인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분리해내기 어렵다.

미국 햄린대 정치학 교수 데이비드 슐츠가 1999년 한 논문에서 이 말을 처음으로 썼다. 그는 98년 미네소타 주지사 선거에서 프로레슬러이면서 영화배우였던 제시 벤츄라가 주지사에 당선될 것이라고 예견한 유일한 사람이다.

과거 연예인 또는 명사가 정치에 입문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55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2류 영화배우 레이건은 그러나 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된 뒤 정치에만 전념했다.

그의 주지사 선거 당시 공보비서였던 린 노프지거는 “레이건이 출마 선언을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 멍청한 배우가 출마했다고?’라고 할 정도로 시큰둥했다”고 밝혔다.

한국도 과거 영화배우 신영균, 신성일, 코미디언 고 이주일, 탤런트 이순재, 최불암씨 등이 국회의원을 했다. 그러나 이주일씨가 유세를 하면서 오리걸음을 걷거나, 최불암씨가 TV 드라마 ‘전원일기’의 양촌리 이장님 웃음을 짓지는 않았다.

이들은 정치의 문턱을 넘으면서 연예인의 자취를 거의 떨쳐 버렸다.

그러나 폴리테이너들은 정치에 입문해서도 연예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는다. 좀 심하게 말하면 자신을 희화화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슈워제네거는 미 NBC 방송의 토크쇼인 ‘투나잇 쇼’에서 자신의 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온 자신의 대사 “Hasta la vista(잘가라), 베이비”, “I'll be back(다시 돌아오마)”을 자연스럽게 말한다.

폴리테이너의 원조격인 제시 벤츄라는 주지사로 있으면서 미국 프로레슬링 단체 WWF의 경기에 출연해 해설을 하거나 심판을 보는 쇼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또 CBS 방송의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시합에서 꼭 피를 보고야 마는 프로레슬러이면서 TV 리포터이자 탤런트인 일본 자민당 소속 참의원 의원 오니타 아쓰시는 역시 프로레슬러이면서 중의원 의원인 하세 히로시와 올 5월에 레슬링 시합을 벌였다. 일본 스포츠신문들은 ‘중참대결’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2000년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좌절한 뒤 내년 총선 출마가 유력한 고승덕 변호사가 시사 프로그램이 아닌, 코미디에 출연하거나 교양 오락 프로그램인 SBS의 ‘솔로몬의 선택’에 고정 출연하는 것도 폴리테이너로서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에 투표 한다

데이비드 슐츠는 “대중의 인식(perception) 속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사람들은 이미지에 투표한다”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서 말했다.

그는 제시 벤츄라가 ‘용맹무쌍한 아웃사이더’ 이미지로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고 분석했다. 지금은 밖에서 강인한 누군가가 들어와 썩은 정치를 뒤집어엎고 악당들을 물리쳐 주길 갈망하기 때문에 슈워제네거의 영화 속 이미지의 효과가 클 것이라고 본다.

폴리테이너의 최대 무기는 결국 지명도로 연결되는 이미지다.

한국 광고업계에서는 약 10년 전부터 ‘인식의 싸움’이 시작됐다고 본다. 상품의 기능이나 속성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알려지느냐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이다’보다는 ‘∼처럼 보인다’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95년 서울시장 선거 때 조순 후보 캠프에서 홍보기획을 맡았던 홍보대행사 신시아의 김정욱 이사는 “폴리테이너는 이미 유권자의 친근감을 확보했다. 그는 이제 신뢰도만 높이면 되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미지 효과는 정치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냉소에서 힘을 받는다.

미국의 여론조사 전문가인 프랑크 룬츠는 최근 미 LA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인의 50%는 연방 상원의원 이름을 2명 이상 알지 못한다. 또 2000년 대선 때 출구조사 결과 유권자 5명 중 1명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가 누군지 몰랐다”고 밝혔다.

또 폴리테이너는 정치와 오락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상황의 산물이기도 하다.

미국 정치인들은 종종 연예인처럼 행동한다. 92년 미국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빌 클린턴은 중하류 계층을 대상으로 한 TV 토크쇼 ‘알세니오 홀 쇼’에 나가 색소폰을 불었다. 앨 고어와 부시도 TV 토크쇼에 출연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31일 방영된 KBS 2TV의 ‘개그콘서트’ 200회 특집에 민주당 한화갑 의원과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이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폴리테이너에게도 약점은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명성과 이미지뿐이다. 정책에 대한 전문성이 크게 부족하다. 김정욱 이사는 “폴리테이너들은 되도록 정치적 담론을 피한다. 그리고 ‘남이 얼마나 못하는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레이건과 슈워제네거 사이…▼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종종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공화당 소속이며 영화배우였다는 점.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일 AP 통신은 “두 사람은 모두 카메라 앞에 서 본 경험이 많고 TV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하며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또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뛰어든 1966년에 레이건은 56세였고 올해 슈워제네거의 나이도 56세다. 레이건은 185cm, 슈워제네거는 188cm로 모두 건장한 체격이다.

영화 이외의 분야에서 관심을 쏟고 성공을 거뒀다. 레이건은 47년부터 영화배우조합 회장을 배우 권익에 관심을 쏟았고 슈워제네거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레이건은 같은 2류 여배우와 재혼한 평범한 배우에 불과했고 슈워제네거는 메가 히트를 기록한 대스타에 미국 명문 케네디가(家)의 규수를 부인으로 맞았다.

그러나 둘 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출마할 때는 영화배우 경력의 하강기를 맞았다. 레이건은 57년 이후 단 1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슈워제네거는 91년 ‘터미네이터2’의 성공 이후 이렇다 할만한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오스트리아 이민자인 슈워제네거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못한다는 것. 이민자는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는 미국 헌법 조항 때문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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