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피플]'불어라…' 김정은 "천방지축으로 돌아왔어요"

  • 입력 2003년 9월 3일 16시 23분


코멘트
'불어라 봄바람'을 통해 코미디영화로 복귀한 김정은, 망가지고 엽기적인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냈던 그는 요즘 연기의 절제를 배우는 중이다. 권주훈기자 kjh@donga.com
'불어라 봄바람'을 통해 코미디영화로 복귀한 김정은, 망가지고 엽기적인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냈던 그는 요즘 연기의 절제를 배우는 중이다. 권주훈기자 kjh@donga.com
《겉으론 순진한데 알고 보면 천박하고, 남자에겐 순종적인 여자. 히트작 ‘가문의 영광’을 관람한 500만명의 관객은 영화배우 김정은(29)의 이런 캐릭터를 ‘소비’했다. 5일 개봉하는 ‘불어라 봄바람’에서 김정은이 연기하는 다방 종업원 화정은 이와 반대로 겉으론 천박한데 알고 보면 순진하다. 그러나 ‘남자에게 순종적’이란 부분에 대해 김정은은 다른 의견을 냈다. “그건 순종적인 게 아니고 ‘헤픈’ 거죠. 화정은 남자도 많아요. 감독님 말처럼 연애 경험이 풍부한 여자들 중에 어떤 여자들은 너무 마음이 착해서 남자들에게 막…, 남자들이 울면서 부탁하면 인심이 좋아 거절하지 못하고…. 순종이란 관념 자체가 아예 없다고나 할까. 근데 제가 (연기)하면 좀 순종적으로 보이나 봐요?”》

지난해 ‘가문의 영광’ 이후 김정은은 ‘앞으로 얼마나 더 쇼킹한 연기를 해야 관객들이 웃어줄까’ 라는 고민에 빠졌다. 언제까지 엽기의 ‘수위’를 높여야 할까?

“제가 ‘망가지는 것’ ‘엽기적인 것’의 대명사잖아요. 하지만 ‘조폭의 딸’이니 하는 것들이 주는 임팩트에만 의존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정은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전작 ‘나비’(올 4월 개봉)의 시사회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그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해봤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 그는 코미디로 돌아왔다.

‘불어라 봄바람’은 좀팽이 소설가 선국(김승우)의 집에 다방 종업원 화정(김정은)이 이사 오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린 좌충우돌 로맨틱 코미디. ‘가문의 영광’에 비해 소소한 웃음을 준다.

“제가 코미디로 한 번 떴으니까 다른 걸(비련의 주인공) 해도 여전히 날 좋아해 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다르게 하고는 싶었어요. 하지만 관객들은 제가 만화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김정은은 “대중이 나를 결코 섹시하게 봐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고 했다. 그러나 코믹과 섹시함이 대척점에 있는 것인 양 여기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무조건 벗고, 누드집을 내야 섹시한가요? 효리(가수 겸 진행자)만이 섹시함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국내에서 섹스어필의 의미가 너무 국한돼 있어요. ‘위대한 유산’에 나오는 귀네스 팰트로를 보세요. 가슴도 정말 밋밋한데 지적이고 신비한 모습이 같은 여자가 봐도 섹시하다고 느껴져요.”

‘불어라 봄바람’에서 김정은은 ‘졸라’ ‘열라’ 등 저속한 부사(副詞)를 남발한다. 욕인데도 그의 입을 통하니 ‘깜찍한’ 느낌이 든다.

“영화에서 욕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욕을 욕인 줄 알고 쓰면 나쁘죠. 하지만 화정이는 자기 말이 욕인지조차 모르잖아요?”

김정은은 이번 영화에서 손끝과 발끝에 유독 신경을 썼다고 고백했다. 전신을 화면에 담는 ‘풀샷’을 통해 만화 같은 제스처를 프레임에 담고자 하는 장항준 감독의 스타일 탓이다.

“탤런트 시절 한 동료가 ‘차라리 내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고 했던 심정을 이해하게 됐어요. 전 연극무대에 서본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 풀샷에 약하죠. 표정 짓는 건 잘 하는데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도 모르겠고…. 거울을 보며 계속 연습했어요. ‘네 소원이 뭐니?’하고 물으면 ‘세계 평화요’라고 대답할 것만 같은 순진무식한 화정이잖아요. 그녀라면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을 어떻게 오므렸다가 펼까’를 연구했지요.”

김정은에게는 셋째발가락이 넷째발가락보다 짧은 것이 콤플렉스. 그러나 ‘불어라 봄바람’에서 그가 드러낸 발끝 연기에는 남 모르는 노력이 숨겨져 있다.

애드리브까지 몇 배수로 생각해 메모하고 준비하는 김정은이지만, 이번 영화에선 NG를 유독 많이 냈다. 눈의 깜빡임까지 100% 감독의 지시에 따르려는 강박감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한번 해 볼게요’ 하는 게 제 스타일이었어요. 제가 ‘짠’하고 보여주면 사람들이 ‘와’하고 환호해 주니까 나도 모르게 자만해졌죠. 이제 이런 스타일에 한계가 왔어요. 감독님의 아이디어를 송두리째 훔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코미디의 여왕’이란 별칭에 대해 김정은은 “무엇이든 최고란 얘기는 너무 좋잖아요. 대신 멜로 하는 배우들은 나를 부러워할 거니까…”라며 웃었다.

“요즘엔 ‘이건 슬픈 장면이니까 관객 여러분 울어주세요’ 하고 강요하는 자체가 관객에게 부담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더’ 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게 연기라는 생각도 들고….”

김정은은 지금 ‘절제’를 배우는 중이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김정은이 꼽은 영화속 최고 배꼽잡는 장면▼

다음은 김정은이 꼽은 영화 속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 다방 종업원 화정(김정은)과 친구 세라가 신문에 나온 낱말 퍼즐퀴즈를 풀고 있다.

세라=가로 7번 문제. 동의보감을 쓴 사람의 이름.

화정=그 사람이잖아. 허준에 나온… 전광렬!

세라=두 잔데?

화정=어? 이상하다 전광렬 맞는데. 아! 이름이라 그랬잖아. 성은 빼고 이름만 하면 두 자 맞잖아. 광렬.

세라=맞다. (쓴다) 광. 렬. 이건 맞지? 바람 앞의 촛불.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위태롭다는 의미의 고사성어. 위태위태.

화정=아닌 것 같은데. 고사성어잖아. 위태위태는 좀 이상하다. 아슬아슬인 거 같은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