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초의'…‘茶의 중시조’ 초의 스님의 삶

  • 입력 2003년 5월 2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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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스님의 행적을 소설로 직조해 낸 소설가 한승원.사진제공 김영사
초의 스님의 행적을 소설로 직조해 낸 소설가 한승원.사진제공 김영사
◇초의/한승원 지음/391쪽 9500원 김영사

차를 덖는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차를 반복해서 덖을 때마다 향기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중에는 갓난아기의 살갗 향내도 있다. 그것을 배내향 혹은 다신(茶神)이라고 한다. 그 향기를 만나면 누구라도 정신이 맑아지고 그윽해진다. 한승원 선생의 장편소설 ‘초의’를 펼치면서 좋은 글도 역시 차를 덖을 때처럼 여러 가지 향기가 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소설 속에서 다신을 만난 듯 몸과 마음이 헹궈졌다가 마침내는 두눈이 번쩍 뜨였다.

한국 차의 중시조로 추앙받는 초의(艸衣) 스님은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삼절(三絶)로서 차와 선을 방편 삼아 조선말의 덜 깬 승려와 유학 선비, 그리고 벼슬아치를 꾸짖고 제도한 실사구시의 실학 선승이었다. 그뿐 아니라 스님은 범패와 탱화, 단청과 바라춤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재주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다재다능한 예인이었다.

작가는 초의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해 수많은 일화와 허구를 대담하게 직조하여 영화처럼 속도감 있게 작품 속으로 풍덩 빠지게 한다. 천재 지성인이었던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와의 교유(交遊), 당대 최고 선지식이었던 해붕과 백파와의 거량(擧揚), 선비 화가였던 소치 허련과의 깊은 인연 등이 소설 ‘초의’의 주된 이야기 기둥인데, 그것을 아우르는 초의의 삶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진저리쳐지고 눈물겹기만 하다. 깨달은 마음을 암자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차와 선을 통하여 저잣거리에 회향하려 했고, 어떤 때는 범패를 부르고 바라춤을 추면서 존재의 빛과 그림자를 다독이며 거친 세상의 다리를 홀연히 건넜던 분이 바로 초의 선사였다. 작가는 초의의 매력을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초의 스님을 알고 난 지금, 나는 세상이 훨씬 아름답고 향기롭고 넓어 보이고, 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확실히 하게 되었다.”

작가는 절 집안의 일부 오해처럼 초의를 경학에 능통했던 강백으로만 보지 않고 다선삼매(茶禪三昧)로 깨달음을 이룬 선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다산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초의는 다산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초의가 26세 되던 해에 대둔사 천불전 상량문을 다산과 그 무렵 중진 스님들을 제치고 쓴 사실에서 작가는 그 근거를 찾고 있다. 24세에 다산과 첫 대면한 그가 3년이란 짧은 기간에 어떻게 다산의 가르침을 받아 천불전 상량문을 의뢰받을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선승으로 성장했겠느냐는 것이다. 작가는 명민한 초의가 정적들에 의해 극도로 불안해하던 다산을 찾아가 오히려 포용해 주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작가의 주장은 흥미롭고 새롭다. 그러나 나는 소설 ‘초의’의 진정한 가치를 한승원 소설의 완숙과 사상의 만개에서 찾고 싶다. 시적 감수성과 소설적 상상력, 그리고 선생의 유불 노장 철학이 원융무애하게 녹아든 작품이 바로 소설 ‘초의’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화엄의 바다를 이룬 이 소설의 감동이 쉬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지금도 개울물 소리가 돌돌 들려오는 내 산중 처소의 방안은 차를 덖고 있듯 향기가 가득하다. 물 흐르듯이 꽃 피듯이(水流花開)!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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