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서양 시위대는 왜 벗을까

  • 입력 2003년 3월 13일 20시 07분


코멘트
옷을 벗은 캐나다 남녀 30여명이 공원 잔디밭에 누워 몸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호주에서는 전라(全裸) 여성 300명이 축구장에 누워 ‘NO WAR(전쟁 반대)’라는 글자를 이뤘다. 인간 복제 시도로 세계의 관심을 끈 라엘리안 여성회원들도 물 속에 나체로 들어가 반전을 외쳤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임박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반전 시위가 거세지는 가운데 눈길은 자연스럽게 시위자들의 벗은 몸에 쏠린다. 왜 벗을까? 한국에서도 반전 시위는 이어지고 있지만 누드 시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 벗지 않을까?

● 알몸 VS 단식·삭발·혈서(血書)

1976년 7월 섭씨 34도의 열기 아래 작업장에서 농성을 벌이던 한국의 동일방직 여성 노조원들은 이를 해산하려는 경찰과 맞섰다. 머리채를 잡아채며 끌어내려는 경찰에 노조원들은 파란 작업복을 벗어 던진 채 알몸으로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나체시위와 서구인들의 반전 나체시위는 옷을 모두 벗었다는 점만 같다.

노조원들이 옷을 벗은 것은 여자의 몸을 남성(경찰)이 감히 만지지 못하리라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벗은 몸에 대한 문화적 터부를 이용해 저항한 것이다.

서구인들의 나체시위는 다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가 투명하고 확고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알몸을 이용한다.

알몸은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빨리 끌 수 있는 방법이다. 모피를 입느니 차라리 옷을 벗고 다니겠다면서 나체시위를 하는 미국의 시민단체 ‘동물의 대한 윤리적 대우를 주장하는 사람들(PETA)’이 대표적이다. PETA는 나오미 캠벨, 파멜라 앤더슨 등 자신들의 운동에 동참하는 스타들의 나체를 이용해 단체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알렸다.

공권력으로 대변되는 권위와 엄숙에 대한 조롱의 의미도 있다. ‘1인 알몸시위’라고 볼 수 있는 스트리킹(streaking·군중이 모인 공공장소에서 발가벗은 채 달리는 행위)이 그렇다.

이에 반해 윤리와 도덕을 중요시하는 유교 문화가 자리잡은 한국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을 삼갔다.

공적(公的·public) 영역에서 알몸을 드러낸 사람은 자신의 정치적 의지가 옳건 그르건 상관 없이 도덕적이나 윤리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네에서 싸우던 두 사람 가운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어느 한쪽이 옷을 벗어젖히면 구경꾼들이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선 것도 그런 이유다.

이런 문화에서 나타나는 저항의 전략은 자기 희생을 통한 도덕적 선(善)의 획득이다.

단식을 하거나 머리를 깎고 심지어는 혈서를 쓰는 고행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드러내고 끝내 의사를 관철하려 한다.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방식, 극단적으로는 할복처럼 자신을 죽이는 일로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서양의 일부 정신분석의 등은 이러한 저항전략을 ‘보복자살(revenge suicide)’로 분석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을 학대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이 맞서는 대상, 혹은 뜻을 같이 하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뭇 사람들에게 도덕적이며 심리적인 부담을 안기는 행동양식이라는 것.

이런 관점에서 “이제 삭발이니 혈서니 하는 과격한 것 말고 부드러운 누드 시위를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공적인 장소에서의 한 의사표현으로서 누드에 대한 인식은 변하고 있다. 지난해 월드컵 당시 반라(半裸) 차림에 보디페인팅을 한 남녀들이 거리낌 없이 거리응원을 나왔고 즉석 스트리킹을 펼친 외국인들에게도 뜨거운 호응을 보인 것은 그런 변화의 한 사례다.

그러나 연세대 김현미 교수(사회학과)는 “저항의 방식은 각 문화의 차이가 역사적으로 구축되어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일 뿐 우열을 가릴 일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