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기업들 심벌로고 세계트렌드 발맞춰 교체

  • 입력 2003년 2월 27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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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성기자 71jis@donga.com
정인성기자 71jis@donga.com
‘하이 서울’ ‘예스 도쿄’ ‘아이 러브 뉴욕’.

현대 도시는 저마다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아이 러브 뉴욕’과 함께 뉴욕을 상징하는 심벌로 떠오르는 빅 애플은 71년 범죄와 경제불황으로 허덕이던 뉴욕시가 시의 이미지를 사과가 주는 평화로움과 풍성함으로 바꾸어보고자 의도적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도시의 정체성은 이처럼 의도된 이미지와 기호로도 만들어진다. 1999년 도쿄에 이어 서울시가 지난해 슬로건과 함께 도시를 상징하는 이미지 ‘하이 서울’을 만든 것도 이를 노린 것이다.

도시의 정체성은 그러나 중앙이나 지방정부 뿐만이 아니라 기업과 각종 단체에서 만들어 내놓는 기호들의 복합 작용으로도 형성된다. 길거리를 빽빽이 수놓은 기업의 간판, 행사장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엠블럼(휘장), 자동차에, 전자제품에 달려서 거리를 누비고 집안 곳곳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심벌과 로고타입이 그 주역이다.

2002년 하반기 이후 CI(Corporate Identity)를 새로 내놓은 기업들이 늘면서 한국의 도시도 새로운 느낌으로 단장하고 있다. 예전보다 추상화된 기호들, 문자를 기본으로 한 워드마크형 심벌들, 3차원으로 입체화된 로고들, 붉고 푸른 원색에서 살짝 비켜난 중성화된 색상들이 이 같은 변화를 주도한다.

● 인터넷 시대엔 입체디자인

올 1월 선보인 대우일렉트로닉스(옛 대우전자)의 새 CI는 변화된 트렌드를 보여주는 대표사례다. 대우일렉트로닉스는 원래 대우그룹의 공통 로고였던 ‘오리발 심벌’과 딱딱한 고딕체의 로고를 썼었다.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 나가자는 뜻을 담은 이 심벌에 대해 새 디자인을 맡았던 ‘인피니트’ 고재호 대표는 “전자라는 첨단업종에 필요한 이미지를 담지 못했으며 기본적인 뜻을 고객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더욱이 소니 등 세계 전자업계의 전통적인 심벌 트렌드는 글자를 기본으로 한 ‘워드마크’형.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대우일렉트로닉스의 영문 첫 글자인 D와 E를 형상화한 심벌과 영문 회사명 안의 ‘A, E, W’를 비주얼적 형태로 접근한 로고였다.

지난해 11월 대우전자의 우량 사업만 인수해 새 회사로 출발한 대우일렉트로닉스는 그러나 이처럼 파격적인 CI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을 겪었다.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90% 이상인 대우전자로서는 기존 ‘대우’ 브랜드의 해외인지도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 특히 수출팀은 최종 CI가 결정된 이후 가진 임원회의에서도 끝까지 반발했다. 현재는 기존 파란색 대신 파격적인 주홍색이 들어간 간판이 서울 마포구 아현동 대우일렉트로닉스 본사 사옥 등을 장식하며 행인의 시선을 끌고 있다.

같은 대우 계열사였지만 제너럴모터스(GM)에 인수되면서 새 회사로 태어난 GM대우(옛 대우자동차)는 ‘입체화된 심벌’이라는 측면에서 파격을 추구했다. 대우일렉트로닉스와 달리 국내 시장을 주로 공략해야 하는 GM대우는 기존 대우의 느낌을 살리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기존 ‘오리발 심벌’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은색으로 첨단의 이미지를 강조했으며 3차원적 느낌이 들도록 디자인한 심벌이 나왔다.

사실 입체 디자인은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2차원적인 대형 장식물뿐만 아니라 3차원 영상의 구현이 가능한 디지털 환경에도 적용되도록 디자인에 ‘멀티 플레이’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

오랜 전통의 BMW가 97년 입체적 표현을 도입한 엠블럼으로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파랑색을 기본으로 한 우리은행의 CI는 명도와 채도가 다른 푸른색을 겹쳐 써서 2차원적 느낌을 자아낸다.

단순한 입체화뿐만 아니라 심벌이 여러 형태로 변형돼 적용될 수 있다는 점도 CI디자인의 멀티화 경향에 해당한다. 지난해 8월부터 도입된 신한은행의 지구 모양 심벌은 워드마크형과 입체형 심벌이 복합적으로 표현돼 있다. 입체적인 느낌으로 표현된 구(球) 안의 S자는 신한은행의 앞 글자를 표현하면서 ‘길’ ‘새싹’ ‘비둘기’를 각각 상징하는 것이다. 신한은행은 그룹이 주관하는 행사나 이벤트 등에 이 CI를 응용하면서 때로는 비둘기 부분만, 때로는 길과 새싹의 일부분만 넣어 표현한다.

‘인터브랜드’ 이장욱 실장은 “예전에는 한 간판 안에서도 워드마크면 워드마크, 심벌이면 심벌이 확연히 구분됐으나 지금은 경계가 모호해졌으며 필요에 따라 일부분만 떼어 내 쓰기도 한다”며 “소비자들은 이들 기호의 종합적인 느낌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 “너무 파격적” 기업내 논란도

지난해 10월 도입된 국민은행의 새 CI는 파격적인 색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초록색 붉은색 노란색의 원색을 주로 썼던 기존 CI와 달리 짙은 회색 계열을 바탕색으로 깐 뒤 밝은 노란색과 대비시켰다. 한국의 주요 기업 가운데 중간톤인 회색을 심벌의 주 색상으로 선택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만큼 내부에서도 ‘너무 파격적’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은행 영업연구팀의 김승원 과장은 “해외, 특히 유럽에 가보면 다양한 색상의 간판이 길거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의 간판 색상은 너무도 천편일률적”이라며 “고급스러운 은행의 이미지와 세계적 추세를 한눈에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이번 CI는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문자위주의 심벌마크와 추상화된 별 모양을 넣은 것도 세계 트렌드를 따른 것.

● 99년부터 추상적인 심벌 등장

심벌의 추상화는 조흥은행의 사례에서 이미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99년 영문 대문자 CHB로 새 CI를 택한 조흥은행은 영문 로고 아래위로 줄을 그어 하늘과 땅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예전 같으면 실제 하늘을 그렸을 것이라는 게 디자인 업계의 설명이다.

사무기기 전문업체 신도리코가 지난해 내놓은 새 CI의 심벌은 복사기에 복사용지를 넣고 빼는 과정을 사각형으로만 표현해 시선을 끈다. 신도리코의 영문 첫글자 ‘S’와 복사기를 동시에 표현했다는 게 회사측의 설명이다.

코리안 리(옛 대한재보험)는 민영기업으로 출발하면서 과거 CI의 지구본 모양을 이어서 쓰고 있지만 완전히 지구본임을 알아볼 수 있는 옛 심벌과 달리 추상적인 구 모양을 강조했다.

앞으로는 인텔처럼 ‘딩동댕동’ 소리 하나로 이미지를 전달하거나 냄새, 맛까지 동원되는 ‘오감(五感) 동원형’ CI도 도입될 것이라고 디자인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한국 길거리의 기호들이 세계적인 트렌드를 담아 바뀌고 있지만 CI는 단순히 ‘디자인상의 유행’을 담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세계적 디자인 기획사인 넬리로디사의 넬리 로디 대표는 “트렌드는 이미 우리 내면에 잠재돼 있는 부분을 예견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고려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분석이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25일 열린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행사장에 등장한 엠블럼은 이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신문고를 컨셉트로 해서 국민 세 사람이 이를 둘러싸고 있는 이 엠블럼은 15대 대통령 취임식의 엠블럼도 만들었던 브랜드웍스에서 제작했다.

이 회사 김혜옥 사장은 “15대 때는 인간 김대중이 고난과 시련을 뚫고 대통령에까지 오른 점을 강조하고 그에게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봉황을 소재로 금색을 썼었다. 그러나 16대 때는 인수위원회에서 국민이 보이는 엠블럼을 원했다. 소재를 고민한 끝에 국민과 신문고가 함께 등장하는 엠블럼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대부로 꼽히는 폴 랜드는 “만일 기업의 이미지가 전체적인 활동상황, 회사의 상품은 물론 그 기업의 목표와 신념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런 이미지는 기껏해야 창문의 장식에 지나지 않으며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사기”라고 말했다.

‘신문고’와 ‘국민’이 21세기 한국민에게 잠재된 내면을 끌어낸 것이라면 이것이 ‘창문의 장식’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엠블럼을 주문한 ‘클라이언트’의 몫이 될 것이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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