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서화집 ‘도가와 왈종’ 낸 이왈종 화백

  • 입력 2003년 2월 11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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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화백이 제주 컨벤션센터에 건 자신의 작품 ‘대한민국’(2002)앞에 섰다. 6개월여 작업끝에 완성한 이 작품은 3mX10m 대형으로 세계각국 월드컵 선수들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 응원단의 에너지를 표현한 것이다. 제주=허문명기자
이왈종 화백이 제주 컨벤션센터에 건 자신의 작품 ‘대한민국’(2002)앞에 섰다. 6개월여 작업끝에 완성한 이 작품은 3mX10m 대형으로 세계각국 월드컵 선수들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 응원단의 에너지를 표현한 것이다. 제주=허문명기자

마흔 다섯 나이에 교수 자리를 버리고 아무 연고없는 제주로 가 10여년 넘게 혼자 살고 있는 화가 이왈종(58). ‘왈종풍’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확고한 자기 세계를 만든 작가. 그러면서도 30여년 한결같이 모든 화가들의 바람인 작품성과 흥행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화가.

얼마 전 ’도가와 왈종’(솔과 학)이란 책이 출판사를 통해 왔다. 한문학자 백파(본명 이병희·한서대 겸임교수)가 풀이한 노자·장자에 이화백이 자신의 그림 250여장을 곁들인 서화집이었다. 책을 집어 들고 그를 한번 만나보자 생각했을 때 내심 걱정이 앞섰다.

‘중도’니 ‘관조’니 이야기하는 사람 특유의 선문답으로 곤혹스럽게 하지는 않을까. 인기작가라는 무게에 기자가 지레 압도당하지는 않을까.제주의 날씨는 흐리고 쌀쌀했다. 한라산에 폭설까지 내려 부득이 서귀포 그의 작업실로 가는 길은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서화집 ‘도가와 왈종’ 중에서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1999. 사진제공 솔과 학

그러나, 이런 불안은 서귀포에 있는 활짝 열린 그의 집 대문 앞에서부터 사라졌다. 앞마당에 가득한 온갖 꽃과 나무들 사이로 그가 나타났다. 검은색 스웨터에 진회색 작업바지, 주름이 웃음이 되어버린 얼굴이 절간에서 일하는 불목하니 같았다. 첫 인상이 맘에 들었다.

작업실 벽에 붙어 있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보였다. 뭔가 특별해 보인다. 예감은 적중했다.

“그 그림을 돋보기로 샅샅이 뜯어본 적이 있다. 치마선, 얼굴선, 모든 선(線)이 너무 좋다. 눈동자도 빗살무늬를 만들어 그렸다. 130여년 전 그는 혁명가였다.”

목소리는 낮았고 말은 싯구를 던지듯 끊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유독 시를 많이 읽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상상력이 없으면 그림이 안된다. 시는 상상력을 불어 넣는다.”

―상상이 안되면 어떻게 하나.

“나를 해체하기 위해 용을 쓴다. 한마디로 이성을 버리고 감성을 얻기 위해 말이다. 혼자 술을 먹어 보기도 하고 천장만, 바다만 몇시간씩 뚫어져라 보기도 한다. 그러면 생각이 맑아진다.”

―그림은 테크닉이 우선 아닌가.

“어린아이, 심지어 뇌성마비 장애인들 그림이 감동을 준다. 그림은 누구나 다 그리는거다. 무엇을 그리느냐가 중요한거지.”

―이화백 그림이 요즘 수건이며 냅킨 디자인으로도 쓰인다. 너무 흔하면 싸구려가 되지 않을까.

“누가 내 그림이 어느 집 화장실에 걸려 있다고 전하더라. 근데 화장실이면 어때. 그림 팔자가 사나워서 그런거지, 내 탓인가. (웃음)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다.”

―그림을 왜 그리나.

“먹고 살기 위해서지. 나는 작가라는 말보다 생활인이라는 말이 좋다. 나더러 작가라고 하는 사람들한테 제발 피곤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 (웃음)”

그의 겸손과 솔직함은 다름아닌, 자신감이었다. 겸손과 솔직함을 자신감으로 받아 들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는 지금도, 정말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하루 10시간 넘게 작업한다. 서울서 내려온 건 잡다한 것들에서 벗어나 일하러 온거다. 한 5년만이라도 그림만 그리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는 “결국 버리니까 얻어지더라”고 했다. 그와의 대화 중에는 ‘집착’ ‘절제’ ‘관조’ ‘순리’ ‘놓아버림’ 이런 단어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독자들이여, 그가 ‘놓아버림’으로써 얻은 ‘무위(無爲)의 선’에 감춰 진 치열한 내적 투쟁과 스트레스를 놓치지 말 일이니. 어디 쉬운 일인가. ‘평생 그리다 죽을꺼다’는 그의 선언을 들으며 ‘나는 평생 뭐하다 죽을까’ 생각했다.

제주〓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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