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 생각에는…]"설에도 수학문제집부터 챙기는데…"

  • 입력 2003년 1월 28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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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위)과 절 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여학생들. 아이들에게 설날 하루라도 공부 걱정 없는 즐거운 명절이 되게 하자.동아일보 자료사진
학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위)과 절 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여학생들. 아이들에게 설날 하루라도 공부 걱정 없는 즐거운 명절이 되게 하자.동아일보 자료사진
주부로 살다 보면 가끔 약이 되는 것이 이웃과의 수다다. 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에게 돈을 내고 수다를 떤다지 않는가.

‘건강수다’ 상대인 아파트 같은 층의 동현엄마는 맏며느리다. 며칠 전 만난 동현엄마는 동서가 작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를 공부핑계로 제사 때 시댁에 데려오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동현이는 동서네 아이와 같은 나이라도 장손이라 꼬박꼬박 시댁 제사에 참석하는데 말이다.

“초등학생이 벌써부터 공부 때문에 집안 행사에 빠져?” 하고 맞장구 치는 나도 남을 비난할 입장은 아니다. 며칠 전 중학교 가는 큰 아이에게 “이번 설날 할머니 집에 갈 때는 꼭 수학문제집을 챙기라”고 엄명을 내렸으니까.

고3 수험생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이 되면 학원 다니느라 제사에 참석 하지 않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초등학생들도 고학년이 되면 어른들만 제사에 참석하는 집이 적지 않나 보다.

요즘에는 제사에 참석하고 ‘현장체험 보고서’를 제출하면 학교에서는 결석으로 처리되지도 않지만 문제는 학원이다. 보충수업을 이유로 그만큼 아이들을 붙잡아 놓으니 아이들은 보충수업이 싫어 부모를 따라 나서지 않는다.

설이나 추석은 제사보다 나은 편이지만, 이번 설에 아이 수학문제집을 챙기는 나처럼 마음 바쁜 엄마들에게 설 연휴는 일종의 ‘장애물’이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 명절은 이렇지 않았다. 풍성한 먹을거리, 모처럼의 넉넉한 용돈을 떠올리며 설 며칠 전부터 기분이 들떴다. 음식준비에 바쁜 엄마 따라다니면서 떡이며 전이며 얻어먹는 것도 얼마나 즐거웠던가.

도시에서 살다보면 친척들과 만나는 기회도 명절이나 제사가 아니면 많지 않다. 어른들끼리도 자주 못 만나다보니 아이들도 사촌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 집집마다 아이를 많이 낳지도 않는데,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가까운 피붙이 없이 얼마나 외로울까 .

경기 일산신도시에 사는 연주엄마는 시댁 장손인 큰집 조카가 작년 봄 대학에 합격할 때까지 제사는 물론이고 설 추석에도 안 나타나더니 대학생이 되어서도 작년 추석에 끝내 안 오더라고 씁쓸해 했다.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고적답사니 다례니 우리문화 찾기가 유행이다. 이런 행사에는 열올리면서 정작 집안의 가족행사에 공부 핑계로 아이들을 빠지게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이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 외에 다른 가족의 정을 알게 하는 가정교육을 외면한다면 언젠가 우리 세대가 외면 당할 것이다.

늙은 노부부가 상 차리고 기다리는 설날 아침 걸려오는 전화 한 통. “어머니, 우리 애들 데리고 스키장 가요!” 상상에 그쳤으면 좋겠다.

내리사랑에만 몰두하던 우리 엄마들이 언젠가는 자식들의 치사랑에 목말라할 것이다. 그래, 이번 설날에는 하루만이라도 아이가 명절 기분에 푹 빠지도록 내버려두자.

박 경 아(서울 강동구 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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