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희곡]전소영/희망과 절망은 내 작품의 자양분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5시 52분


전소영
▼당선소감▼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그건, 어느 유명한 작가가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다만 그 문장을 노란색 포스트 잇에 그대로 옮겨 적은 후, 모니터 위 한가운데에 붙여놓았을 뿐이다. 학창 시절, 액자에 끼워져 교실 정면의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그것도 항상 걸려 있었건만 지금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급훈 정도로만 여겼었다, 처음엔.

창문을 요만큼만 열어놓아도 바람에 마구 날리는 포스트 잇이 못 미더워서 투명 테이프로 덧붙여 양쪽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옆의 투명테이프를 손톱으로 긁다가 만 흔적이 있다, 너무 부담스러워 떼어버리려고 하다가 그만둔 것이 수 차례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실행에 옮기기는 거의 불가능한 방학 생활계획표를 동그란 원 안에 빼곡하게 그려 넣은 다음, 내가 그린 원 안의 계획들에 스스로 질려 버린 그 느낌이었다. 글을 쓸 때마다 이 문장과 마주해야한다는 건, 적어도 나에게는 그만큼이나 버겁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희망하고, 항상 절망하기에. 게다가 매일매일 쓰지 못한다. 그래서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글을 쓴다는 게 가능할까? 선뜻 ‘답은 이거다’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글을 써야겠다는 동문서답뿐.

모르긴 해도 당사자인 아이작 디네센도 설마 처음부터 그렇듯 도인처럼 글을 썼겠는가 하고, 스스로를 추슬러 가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당선소감이 아니라, 각서나 반성문이라도 쓰는가 싶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 또 감사드리며. 힘겹게 지켜봐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동생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나보다 더 기뻐하시는 아버지께 많이 죄송할 따름…. 그리고 멀리 가있는 친구에게도.

언제 마지막으로 교회에 갔었는지도 아득한 ‘교인’이지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글 쓰겠다는 나를 많이 걱정하셨던, 실은 그래서 더욱 기뻐하실, 보고 싶은 그리운 어머니께.

△1969년 서울 출생 △1993년 성심여대 회계학과 졸업 △2001년 영화진흥위원회 극영화시나리오 공모 우수작 당선

▼심사평…신선한 발상-연극적 개성 돋보여▼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전소영씨의 ‘다섯가지 동일한 시선’을 뽑았다. 어느 날 28세짜리 현재의 ‘나’가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만나면서 겪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누구나 내면에서 스스로 겪을 법한 갈등과 선택의 상황들을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빌려 재미있게 풀어냈다.

신선한 아이디어 외에도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연극적인 코드가 다분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에 형상화시켰을 때 배우나 관객 모두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동했다. 상식이겠지만, 희곡 집필에 있어서 대전제는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장르와 차별되는 어떤 연극적 특징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마지막까지 낙점을 주저하게 만든 작품은 송유억씨의 ‘가족사진’이었다. 매끄럽고 차분한 전개 속에 여운을 남기는 미덕이 있었으나 평이한 줄거리가 싱싱한 맛을 반감시켰다.

북 잠수함 침투 사건을 다룬 ‘고래’, 병동에 기거하는 노인들의 회한을 담은 ‘너는 피고지고 나는 살고죽고’ 등도 역시 신선함이 떨어지는 작품들이다. 그 밖의 여러 응모작에서 작법의 기본기는 보이나 극적 진행의 단순함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70여편의 응모작은 거개가 약간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나 극적 설득력이 부족해 덧없는 해프닝으로 끝나거나,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스토리가 조합된 미완의 작품들이었다.

이번 당선작은 흡족한 작품은 아니었다. 전후 구조상의 문제로 무대에 형상화했을 때 관객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구석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무대에 올리게 되면 다시 한번 신중히 검토해서 작품의 장점을 더 잘 살려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춘문예의 화두는 여전히 ‘새로움과 신선함’이다. 응모작을 읽으면서 많은 예비 작가들의 속내를 읽으며 즐겁기는 했으나 중년의 연극인에게 경종을 울릴 만한 작품을 찾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극장에서 많은 공연을 체험하면서 희곡만이 가진 특성을 찾아내는 데 정진해주길 바란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희곡 역시 쓰는 이의 그릇 만큼만 반영할 수 있다.

윤 호 진 단국대 연극영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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