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부천서 성고문’ 권인숙씨 자전적 산문집 ‘선택’ 펴내

  • 입력 2002년 12월 12일 17시 52분


권인숙씨는 성고문 사건 주인공에서 노동운동가를 거쳐, 여성학자로 살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다./전영한기자
권인숙씨는 성고문 사건 주인공에서 노동운동가를 거쳐, 여성학자로 살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다./전영한기자
《‘부천서 성고문 사건’(1986)의 주인공에서 지금은 미국에서

여성학 교수(사우스플로리다주립대)로 살아가고 있는 권인숙씨(38).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에서 여성학자가 되기까지, 그에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많은 이들의 궁금증에 대해 권씨가 진솔하게 답한 책이 나왔다.

‘이름 석자만으로 이미 공공성을 띠고 있는’ 그가 내밀한 삶과 여성학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담담하고 당당하게 풀어낸 자전적 산문집 ‘선택’을 펴낸 것(웅진닷컴).》

11일 저녁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그를 이튿날 일민미술관에서 만났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돼 새벽에 일어났다고 말문을 열었지만 시원시원한 몸짓과 활달한 목소리에서 별로 피곤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167㎝의 키에 날렵한 몸매를 가진 그는 검은색 니트와 발목까지 오는 롱스커트를 입어 세련돼 보였다.

많이 망설이다 펴냈다는 이 책에는 ‘무거운’ 이름이 주는 무게를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한 한 인간의 초상이 담겨 있다.

#나는 나다!… 여성학자로 새출발

‘부천서 사건의 주인공은 독특하고 교묘하게 희생자와 투사가 결합된 이미지였지만 실제의 자신은 그 두 가지와 별로 닮지 않았다. 그러니 정체성에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중요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에 대한 근원적인 자부심도 있었지만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연민도 컸다. 그의 결혼식 소식은 9시 뉴스에 나왔고,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다. 걸맞지 않은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했다.

그런 그에게 여성학을 공부하기로 선택한 것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여성학은 그에게 단순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수습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9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에 박사학위를 땄다.

“어렸을 때부터 남이 믿는 것, 통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설득이 잘 안 됐어요. 여성학을 선택한 것도 사람들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만족감을 갖지 못했던 결혼생활을 접고 열한살된 딸을 혼자 키우고 있다.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그는 “납득이 안 되는 부당함을 소화하지 못한 채로 울퉁불퉁하게 살았던 시절”이라고 적고 있다.

#그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래저래 다른 사람에게서 숱한 상처를 입었지만 그에게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이야’라고 느끼게 해준 것도 사람들이다. 너무 엄숙하고 시대에 주는 무게에 눌린 채 살아가는 그에게 ‘젊어서 놀아’라며 자신을 돌보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고 조영래 변호사, 고통 속에서도 삶의 낙천성과 밝음, 도리와 인정을 잃지 않고 살았던 큰언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실천하는 여성학자 신시아 인로 등이 그들이다. 물론 어려서부터 딸의 별남과 남다름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무조건적으로 믿어주었던 부모님의 몫이 제일 컸다.

#세상과 맞서며 당당하게 산다

시대의 아픔에 고뇌하는 진지한 사람일 거라는 세상의 고정관념과 달리 그는 유쾌, 통쾌, 경쾌한 삶을 지향한다. ‘먹물 든’ 사람들이 강조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름’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의 고정관념에 엇나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성형수술에 대해 비난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법은 없다’는 교육철학을 갖고 있다. TV드라마 중독증에 가까울 정도로 텔레비전을 좋아하고, 자신을 웃겨주는 남자는 모든 게 용서된다는 엉뚱함도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성고문 사건’을 폭로했을 때보다, 그 후의 삶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더 찡하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자기 말과 행동, 삶의 방식에 모순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서 진정한 용기의 의미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