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시선집 '시 속에 꽃이 피었네'펴낸 고형렬씨

  • 입력 2002년 11월 20일 17시 31분


시인 고형렬씨 /사진제공 바다출판사
시인 고형렬씨 /사진제공 바다출판사
그가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시는, 책에 담긴 활자의 집합을 넘어 일상으로 뛰어든다. 무심할 때, 슬퍼질 때, 지루한 길을 혼자 가고 있을 때 좋은 벗이 되어 주는 시의 ‘온기’. 시인 고형렬씨(47)가 펴낸 ‘시 속에 꽃이 피었네’(바다출판사)는 그런 따뜻한 책이다.

18일 만난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툭 터트리듯이 시 얘기부터 풀어 놓았다.

“지금까지 시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짐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세계와 사물, 주제들이 너무 무거웠어요. 시인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이지요. 60년대, 4·19 세대 이후 이데올로기에 지나치게 경도됐었지요. 이제는 언어에 피곤이 온 듯해요.”

그는 시인들이 세계를 미소로 바라볼 수 있기를, 보다 여유롭고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시에 대해 개심(開心)이 필요하다는 것. 광장주의적인 우리 문학이 손가락 끝, 나뭇가지 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시 속에…’는 시를 통해 새롭게 세상을 보고, 진지하게 자기를 발견하고 싶은 그의 마음에서 싹을 틔웠다. 조용한 내면의 창을 통해, 그가 읽어내는 시 구절마다 켜켜이 삶이 피어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한하운의 ‘파랑새’,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등 50여편의 시에서 고씨는 숨어있는 우리네 모습을 눈밝게 찾아낸다. 백제 여인의 노래 ‘정읍사’. 고씨는 멀리 떠나있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명징한 이미지로 드러낸다. 둥근 달 아래, 아이를 등에 업은 한 여인.

‘삽짝에 멀리 해가 졌습니다. 사위는 이제 어둑해졌지만, 초저녁인데도 온누리에 달이 밝았습니다. 오늘 따라 여인은 집에 있을 수가 없어 한참 동안 길을 걸었습니다. 어느덧 언덕에 올라 있습니다. (…) 시골 숲의 바람내가 스쳐 지나갑니다. 산에서 논에서 새와 벌레들이 울고 있습니다. 아으 다롱디리, 건너뛰고 싶어집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한 편의 시로 대신한다고 했다.

“중학생 시절, 만취해 귀가하신 아버지가 ‘오메- 단풍 들겄네’하시던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김영랑의 그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에게는 생활과 감정 속에서 반짝이며 노니는 것, 거창하지 않은 것이 ‘시’다.

흐린 오후, 창 밖으로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을 보며 그는 “11월은 절벽같은 계절이지요”라고 했다.

“외로움이 충만할 때예요. 자연상태, 합일된 세상에서 고독은 무섭지 않지만 도시의 11월은 그렇지 않지요. 도시는 자연법칙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이니까요.”

시를 찾을 때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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