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정치현실 비판시집 '문제들' 펴낸 박의상씨

  • 입력 2002년 6월 24일 18시 29분


‘정치가 무엇인지 아느냐 물으신다면

모른다, 말하겠어요

정치가는 아느냐 정권은 아느냐, 물으신대도

이런 정부는 꼭 있어야 하는지… 아느냐 물으신대도

모른다, 모른다, 말하겠어요.’(문제들 13 중)

시인 박의상씨(59)의 시집 ‘문제들’(아침나라)을 보면서, 잠시 착각이 일었다. 옛날 군사정권 시절 몰래 몰래 돌려 읽었던, 참여시를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런 반정부 시인이 아직도 있나. 찬찬히 읽어 보니 그의 시는 정치 비판이라기보다 정치 부정이다.

‘나도 나이가 곧 60이 된다

이젠 이런 놈의 정부 말고 다른 정부가 하나 갖고 싶다

사랑해서 미치겠는

10년쯤은 가는 정부 하나

까짓 것,…있는 돈 반이라도 내다 주고 싶은…

아니, 아니, 아무 정부 하나 없이

그저,…정부 없이.’(문제들 38)

정치인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실망에서부터 정치 현실에 대한 환멸을 담은 단어들이 때로는 취기를 빌린 뇌까림, 때로는 피끓는 청춘이 토로하는 날선 언어들이다.

박씨는 대학 3학년때인 196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후, 한국시협상을 수상하는 등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해 온 중견 시인이다. 이번 시집이 열 번 째다.

기자는 그와 인터뷰하면서 그가 몇 년전 상처(喪妻)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업작가가 아닌 20여년간 무역회사를 경영했던 사업가였음을 알게 됐다.

-시집 ‘빨간 구두를 산 여자’(1995)를 보면서 어떻게 중년 여자들 심리를 이렇게 잘 알까, 사모님이 참 행복하겠구나 했는데….

“시인의 아내는 외롭다. 한국 남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아내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낮에는 정신없이 사업에 몰두하고 밤에는 혼자 글 쓰고.”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인생관이 바뀌었나.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떻게든 산다는 것이 중요하구나, 이런 거 생각했다.”

-허무하지는 않았나.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삶이 문제지. 죽음이 허무하니까 삶이 허무하다? 이건 반대다. 얼마 전 김영승이라는 젊은 시인의 싯구를 보면서 무릎을 쳤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살지 않고 살 때까지 살겠다.’ 죽기를 두려워해서 살 것도 없지만, 죽는 게 허무하다고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거다. 삶은 전부를 던져서 살 만한 거다. 그런데 인간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있는게 있는 데도 과감하게 던지질 못한다. 마치 사랑을 겁내는 것처럼…. 상처 입을까, 잃어 버리지 않을까, 지금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지 않을까….자꾸 뒤돌아 보고 주저한다.”

그는 “요즘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허무적 노장적 삶의 태도, 예를 들어 ‘다 버려라’ ‘죽을 때 뭘 가지고 갈려고 하나’라든지 ‘슬로우’를 강조하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이르다”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도 안되는데 지금보다 훨씬 더 만들도 쌓고 해도 모자라다”고 덧붙였다.

-낮에는 사업가로, 밤에는 시인으로 살다가 전업 시인이 된 이유는.

“사업을 시작했으니까 성공해야 하고 성공하려면 바빠야 하고. 직원들 월급 잘, 제때, 많이 줘야 하고. 아내 죽고 사업 정리하면서 진짜 내 일(글 쓰는 일)을 해야 겠다고 맘먹었다.”

-시작(詩作)이 독특한 데 시 철학이 있다면.

“시가 과연 만화나 에세이나 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깨달음의 말이나 이런 것과 어떻게 달라야 하나 늘 고민이었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면서 나름대로 내 방식을 찾은거다. 꽃을 예로 들면, 꽃은 성취고 상처고 모든 것을 집약한 절정이고 끝은 슬프고… 흔히 이렇게 쓴다. 나는 그런 정도로만 쓰고 싶지 않다. 꽃을 엉뚱한 다른 사람들과 대결시키거나, 아예 다른 쪽으로 확장을 시킨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만큼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인생은 어둡고 끈적끈적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관계고 유머러스하면서 블랙이고 코믹하면서도 우울하고….”

가만히 보니, 그는 말도 꼭 시를 쓰는 듯 했다. 깔끔한 양복에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모습은 전업 시인이라기보다, 평범한 생활인처럼 느껴졌다.

-사회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쓴 것은 처음인가.

“본격적으로 정치 사회문제에 파묻혀 2년이나 허부적거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신이후 80년대에는 이른바 저항시라는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이 다 낙원으로 갔는지. (웃음) 문제가 있는 한, 말할 것이 있는 한, 시인은 말해야 한다.”

-우리 사회 문제의 근원은 뭐고, 해결책은 뭔가.

“언젠가 미국에서 핵물리학 교수한테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더니 ‘동양은 아더 오소리티(other authority)가 너무 많다’고 하더라. 나이, 학연, 지연 등 등 오소리티가 너무 많으니까 자기로 살지 못한다. 그러니, 주체성이 없고 자아가 없고 자기 판단하에서 살지 못한다. 다른 오소리티에 기대니까 자기로 살지 않는거다.”

-‘만들고 쌓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숨통 틔우는 거다. 삶은 달리는 건데 앞만 보고 달릴 수는 없다. 뛰다가 이상한 게 있으면 기웃기웃한다. 그게 예술이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써 먹는 게 아니다. 무목적성의 목적성이라고나 할까.”

-만드는 것은 계량과 합리의 영역인데, 논리적이지 않은 시는 너무 약하지 않은가.

“시는 기본적으로 여성과 약자의 입장이 뒤섞인 언어기법을 갖고 있는 장르다. 하지만, 논리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역설, 아이러니의 힘이다. 이것이 시의 최고 힘이다.”

-약하지만, 강하다는 것인가.

“약강을 말할 수는 없고. 시에는 두가지 힘이 있다. 하나는 슬퍼서 몸부림치는 사람한테 ‘슬퍼할 것 없다. 너만 그런게 아니다. 시간이 가면 잊혀진다’처럼 진정시키는 힘이고 또 하나는 ‘일어나라. 때려 부셔라’ 동요시키는 힘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가는 것은 안 좋다. 목적의식을 갖고 효과를 써먹는 거니까. 시인은 그래선 안된다.”

-시를 잘 쓰려면.

“돈 시간 열정을 다 바쳐야 한다. 말을 적게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이 써야 한다. 1년에 1000편은 써야한다. 그 중에 10개 고르면 좋은거다.”

그는 국내문제를 다룬 ‘문제들’ 연작 시리즈에 이어 ‘미국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음 시집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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