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한국기독교 비판 '예수는 없다' 저자 오강남 교수

  • 입력 2002년 6월 12일 18시 29분


(사진: 박영대기자)
(사진: 박영대기자)
지난해 ‘예수는 없다’는 책으로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신랄하게 비판해 주목을 받았던 오강남 교수 (61·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 종교학 교수)의 첫인상은 전혀 도발적이지 않았다. 스트라이프 무늬 와이셔츠에 넥타이도 매지 않고 콤비 양복을 걸친 그는 부드럽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가 두 번째 책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현암사)을 펴냈다. 학회 참석차 잠시 귀국한 그를 만났다. 기독교적 배경에서 자라고 공부했지만, 그의 대화에는 예수 못지 않게 석가도 많이 등장했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이 도대체 뭔가요?

“그걸 얘기하면 책이 안 팔리죠 (웃음). 빌라도가 예수에게 ‘진리가 뭐냐’고 물었는데 예수는 답을 외면합니다.”

-왜요?

“첫째는 빌라도 주제에 감히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둘째는 말해 보았자 빌라도가 알아 듣지 못할 것이다, 셋째는 진리가 너무 엄청나고 크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랬다. 저는 셋째 가설을 믿어요. 도(道)란! 진리란! 입으로 꺼내는 그 순간, 멀어지는 거니까.”

-그런데, 진리에 대한 책은 왜 쓰셨어요?

“‘눈물의 씨앗’이란 말이 있듯 ‘생각의 씨앗’을 주고 싶어서지요. 나는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에요. 그러면 교주가 됐겠지 (웃음). 목마른 사람에게 물가까지 안내하는 가이드에요. 물을 먹든 말든 그건 그 사람 자유지요. 또 불꺼진 방에 촛불을 건네 주는 사람이랄까. 방에 앉든, 서든, 책상에서 공부를 하든 그건 저마다의 몫이지요.”

-지난 책의 주제는 한국 사회의 기독교였는데, 이번 책은 종교 일반을 다루셨네요.

“교민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묶었습니다. 도대체 종교란게 뭐길래 이 야단들인가, 이 야단중에 종교를 갖는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뭐 이런거지요.”

-종교가 뭐에요?

“변화하는 거지요. 궁극 실재와의 관계속에서 내가 변화하는 체험입니다. 종교는 그것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지, 이론이나 교설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달을 보는 것인데 우리 기독교는 손가락에 관심이 많아요.”

-먹고 사는것도 힘든데 진리탐구라니…. 정신적 사치 아닌가요?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면 만족해야 하는데, 만족을 모르는게 인간이에요. 산다는게 뭔가, 의미가 뭔가 뭐 이런 고민을 합니다. 그건,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사는 게) 답답하니까 몸부림 치는 겁니다. 석가도 처음엔 사는게 힘드니까 의문을 가진 겁니다. 같은 티끌이라도 손바닥안에 있으면 감각이 없지만, 눈에 들어가면 아픕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있지요. 일종의 축복입니다.”

-고통이 아니구요?

“하하하. 석가는 세상이, 삶이 고통임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의 기본이라고 했지요.”

-결국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

“자유지요. 자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게 신(神)을 찾는 거고 궁극 실재를 찾는 거지요. 하늘에 존재하는 신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 깨침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일단 모든 고정관념, 편견을 벗어 놓고 열어 놓아야지요. 그 다음 교리나 조직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실재를 찾아 내가 바뀌는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종교가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는 없습니다. 우물안 개구리에게 바깥 세상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지요. 성경은 우물밖 개구리가 우물안에 들어가 말해 준 것입니다. 바깥 세계를 표현한 인디케이터, 즉 손가락이지요.”

-어쨌든, 역사는 합리와 이성이 이끌어 가고 있는데 ‘영성’의 강조는 도피 아닌가요?

“윌버라고 하는 학자는 20세기를 기준으로 이전 세기를 합리 이전, 20세기를 합리, 그 다음 세기를 합리를 넘어서는 ‘트랜스 합리의 세기’라고 했어요. 합리에 대한 반성은 원시로 돌아 가자는 퇴행이어서는 안됩니다. 이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가야지요. 그게 직관입니다. 신비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통찰이지요.”

-자칫, 허무로 빠질 수도 있겠는데요.

“영성의 표현과 열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물론 속세를 벗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쁜 것은 아니지요. 장자에 보면, 요임금이 산에 사는 네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망연자실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들은 산에 가만 앉아 있어도 요임금 같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 겁니다. 요임금을 통해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거지요. 그렇다고 모두가 다 산에 갈 필요는 없지요. ‘어떠 어떠 해야 한다’는 획일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 나가자! 하면 구호나 행동은 강력해질 수 있지만. 하긴, (나처럼) 나가도 되고 안나가도 된다고 하면 흐리멍텅하지. 절대화 시켜야 돈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데 말이에요. 하하하.”

-‘절대’를 믿으세요?

“물론이지요. 절대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는 ‘단절’이 아니라 이것도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지는 ‘관계’입니다. 절대자가 있느냐?는 물음은 ‘있다’ ‘없다’는 존재의 카테고리에 묶이는 겁니다. 불교의 ‘무’(無)‘지요. 그러나 이 무도 결국 유의 상대개념이니까 다시 무를 부정하는 ‘무무’ ‘무무무’가 나옵니다. ‘절대’는 체험의 영역이지, 언어의 영역이 아니지요.”

-기독교계도 그렇지만, 불교계도 요즘 공격을 많이 받고 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만, 스님들한테 참선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라는 이야긴 잘 모르는 소리지요. 우물안 개구리에게 밖에서 가져온 빵을 나눠주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물안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보시를 세 가지로 나눕니다. 물질을 나눠주는 재(財)보시, 진리를 나눠주는 법(法)보시, 용기와 위로를 나눠주는 무외(無畏)보시가 있습니다. 물질만 나눠 주는 게 다는 아니지요.”

-한국 종교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문제의 발단이 되지말고 해결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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