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km이상 '울트라 마라톤'을 뛰는 '울트라 맨'들

  • 입력 2002년 5월 9일 14시 21분


길 위의 울트라 마라토너들. 왼쪽부터 이윤희 김용주 윤장웅씨
길 위의 울트라 마라토너들.
왼쪽부터 이윤희 김용주 윤장웅씨
일본의 대표적인 울트라 마라톤 대회인 사쿠라미치 대회는 매년 4월말 나고야에서 출발해 가나자와까지 270㎞를 달리는 경기다. 울트라 마라톤 대회는 42.195㎞를 뛰는 일반 마라톤의 2배가 넘는 100㎞ 이상을 달리는 초(超)장거리 대회.

올해 이 대회에 참가했던 울트라 마라톤 전문 러너 윤장웅씨(48·한국공항공사)는 대회 이틀째인 4월 29일 0시 30분경 일생일대의 통증을 체험했다. 출발한 지 17시간이 되었을까. 116㎞ 지점부터 격심한 복통이 일어나 1시간 이상을 구토에 시달렸다. 뱃속의 오렌지 알갱이 한 알마저 모두 토해냈다. 지나가던 일본인 경기자들은 모두 그가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러나 종료 시한인 경기 시작 44시간을 41분 앞둔 이튿날 오전 2시19분, 윤씨는 골인 지점인 가나자와 르네상스호텔 앞의 환한 불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수들과 경기 진행요원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곧 이어 윤씨의 가슴에는 완주 테이프가 감겼다. 참가선수 254명 중 42등의 성적. 윤씨는 달리는 내내 이번 대회를 끝으로 다시는 이런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목표지점에 들어오자 마자 7월에 열릴 부산 태종대∼문산 임진각을 잇는 600㎞ 대회를 생각했다.

그는 미국 영화 속의 포레스트 검프처럼 타고난 ‘러너’. 지난해 6월 무박 5일 일정으로 김해공항부터 김포공항까지 500㎞를 완주했다. 최근 1년간 100㎞ 이상 대회에서 완주한 것만 해도 8차례다. ‘고행(苦行)의 레저’인 울트라 마라톤에 미친 사람이다.

윤씨와 비슷한 ‘달리기의 광신도’의 모임이 있다. 2000년 12월 발족한 ‘코리안 울트라 러너스’가 그것이다. 그해 7월 몽고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 참가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울트라 마라톤 대회 참가 기록을 세운 이용식씨(41·회사원)가 9월 추석 연휴 때 ‘강화도에서 강릉 경포대까지 한반도 횡단 대회를 열 테니 자신 있는 사람은 나와보라’고 인터넷에 올리자 도전장을 내민 14명이 주축이 됐다. 현재 회원은 44명이다.

이들은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함께 참석한다. 최근의 사쿠라미치대회에도 5명이 함께 참가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한국에 울트라 마라톤을 전파하는 촉매인 셈이다.

울트라 러너들은 마라톤 대회에 나설 때 “생사를 가르는 일이 벌어져도 주최 측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쓴다. 이마에는 랜턴을 달고, 야광 조끼를 입고, 식품과 약품이 담긴 배낭을 메고 달린다. 달릴 때는 2, 3일간 잠 자는 것까지 포기한다. 이 때문에 ‘정신이 나가 버리는’ 위기를 겪기도 한다. 42.195㎞ 완주만 스물한 번을 한 백전노장 회원 김용주씨(56·서울시청 민방위과)도 이 같은 위기 때문에 지난해 마라톤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레이스를 포기해야 했다.

김씨는 지난해 9월 한반도 횡단 대회(311㎞)에 나가 3일 만에 302㎞ 지점인 강릉 시내까지 들어갔다. 3일간의 수면시간은 고작 40분. 이 지점부터 달리면서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도로 한복판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퇴근길에 있다고 착각해 얼른 택시에 올라타고는 “중계동 갑시다”라고 집 방향을 말했다. 택시기사가 영문을 모르고 한참 달려 나가다가 “서울 말입니까?”라고 되묻자 김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대회 출전 중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게 끝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울트라 러너들은 밤 새워 달리다 보면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졸음을 이겨내다 보면 나무나 벤치 자동차들이 사람처럼 보이곤 한다고 털어놓는다. 2000년 사쿠라미치대회에서는 한 여성 마라토너가 대회 도중 교통 사고로 숨지기도 했다. 달리면서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 동료 주자들이 “괜찮으냐”고 물으면 동문서답하는 사람 등이 속출한다. 육체와 정신이 버틸 수 있는 극한까지 가보는 체험을 하는 이들이 ‘울트라 러너’인 것이다.

이들에게 “그 고통스러운 달리기를 왜 하느냐”고 물으면 “도전과 성취감 때문”이라고 답한다. 회원 중 스포츠 식품 제조업체인 ㈜파시코 이윤희 사장(45)은 “달릴 때 인생이 필름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나긴 코스를 달려 나가면 마치 길 위에 펼쳐진 거대한 사진첩 위를 밟고 달리는 것처럼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고생스러웠던 기억들, 서러웠던 추억들이 하염 없이 지나간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각종 대회 결승점 현장에 가보면 완주한 주자들 가운데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아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 그는 “이들 상념을 헤치고 끝 없이 달려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치 해탈이라도 한 것처럼 신이 나서 달리게 된다”고 말한다. 몸 속 어딘가에서 쾌감 호르몬인 베타 엔도르핀이 터져나오는 때, 바로 ‘러닝 하이(running high)’가 올 때다.

서울마라톤클럽 회원이기도 한 이 사장은 아마추어 마라토너로서 런던 뉴욕 보스턴 로테르담 마라톤 등 세계 4대 마라톤을 완주했다. 올해 3월 제주 울트라 마라톤 대회(210㎞)까지 모두 4차례의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서 뛰었다. 그러나 지난달 사쿠라미치대회에서는 불의의 발목부상으로 마라톤 경기에 참가한 이래 처음으로 완주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9월 그리스 스파르타 슬론 대회(256㎞)가 새로운 목표다. 사쿠라미치대회에는 내년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실패해도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울트라 마라톤과 인생의 공통점이 아니던가.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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