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영원한 수필교과서 '인연'의 피천득선생 인터뷰

  • 입력 2002년 4월 22일 18시 04분


《금아 피천득(琴兒 皮千得·92) 선생은 처음에는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다.

나이들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청을 드리길 몇 번. 마침내 선생은 “동아일보의 옛 이야기를 생생한 목소리로 전해줄 사람이 이제 나 밖에 안 남았다. 그 이야길 하자”며 자택으로 오라고 했다. 다시 쌀쌀해진 바람이 봄옷 속으로 스며드는 지난 17일 오후, 선생이 19년째 살고 있는 서울 구반포 아파트를 찾았다.

아흔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꼿꼿한 몸매와 또렷한 음성을 간직한 선생은 “제자들과 만나 점심을 먹고 방금 귀가했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선생의 부인 임진호(85) 여사도 건너방 문을 열고 눈인사를 건네주었다.》

기자를 서재로 안내한 선생은 “발이 시릴 것”이라며 꽃무늬 수가 있는 흰 슬리퍼를 책상 밑에서 꺼내 기자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마호가니빛 책상 위에는 85년전 선생과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 촛대, 돋보기 안경과 담배 파이프, 금발머리 두 소년이 그네 위에서 잠든 사진엽서가 몇 권의 책과 함께 놓여 있다. 선생이 보여주는, 독일에서 누군가 보내줬다는 엽서 속의 책상 모습과 꼭 닮았다.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선생의 책상 밑에 양주 3병이 가지런히 놓여있어 눈길이 갔다.

“파이프는 내 장난감같은 거예요. 가끔 혼자 입에 물어보면서 놀지요. 난 타고난 체질이 술 담배를 전혀 못해요. 이런 내 체질을 모르는 이가 언젠가 내가 마시는 오렌지쥬스에 술을 몰래 섞었어요. 그걸 마시고 병원에 실려갔지요. 난 술을 마시는 분위기를 참 좋아하는데, 너무 아쉬워요. 인생의 재미를 통 모르는거지요.”

선생의 둘째 아들 수영씨(서울아산병원 부원장)가 가져왔다는 양주는 때문에 ‘접대용’에 불과하다.

선생은 요즘 베토벤 쇼팽 브람스 등 고전음악과 문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직접 녹음한 오디오북, 셰익스피어 극을 비디오로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내가 눈이 좋지 않아 20분 정도만 책을 읽으면 지쳐 버려요. 그래서 수동적이긴 하지만, 듣는 방법을 택했지요. 음악과 오디오북을 듣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요.”

문득 선생이 하드커버의 큰 그림책 한 권을 내민다.

“미국에서 서영이가 보내준 책이예요. 아주 재밌는 내용이 많아요.”

선생은 시를 한줄씩 읽고 해석하며 빙긋이 웃음지었다.

선생의 각별한 딸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고 어떤 의미에선 ‘편애’에 가깝다. 수필집 ‘인연’의 세 장 중 한 장을 ‘서영이’로 이름붙여 딸에 대한 글로 채울만큼….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

“자라는 과정에서 우리 아들들이 섭섭했을 거요.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점도 있지요. 그 옛날 나무장작이 귀하던 시절에, 딸 방에는 나무장작으로 불을 지펴주고, 아들 방에는 구공탄을 넣어줬거든….”

서영씨는 현재 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MIT 물리학과 교수와 결혼해 살고 있다. 서영씨의 아들인 스테판은 영국에 잠시 머물고 있다. 피 선생은 책장 앞에 쌓아둔 책더미에서 ‘Classic FM’(2000년 11월호)이라는 잡지를 꺼내 펼쳤다. 그의 손자를 다룬 기사였다.

60∼70년대 DJ로 유명했던 선생의 큰 아들 세영씨는 캐나다에 살고 있다. 선생의 곁을 지키고 있는 자제는 의인(醫人)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둘째 아들뿐 이다.

“아들이 큰 의사됐대도 뭐 자랑스럽고 뿌듯하지가 않아. 난 딸이 좋아요. 서영이가 미국에서 유학하다가 힘들다고 세 번 돌아왔는데, 다시 가라고 보냈어요. 왜 가기 싫다는걸 자꾸 보냈는지, 내 일생 제일 잘못한 일이 그 일이예요.”

딸을 외국에 떠나보낸 뒤 그는 대신 딸이 가지고 놀던 인형 ‘난영’을 돌보게 되었다. ‘마음을 잡을 수 없는 나는 난영이를 보살펴 주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낯을 씻겨 주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목욕을 시키고 머리에 빗질도 하여 줍니다.’(‘서영이와 난영이’)

피천득 선생이 친자식처럼 돌보는 난영이와 곰돌이 인형. 곰돌이들은 안대를 쓰고 꿈나라로 떠난다.

선생이 하버드대 연구교수로 갔다가 딸을 위해 사온 서양인형 난영이의 나이도 어느새 50이 눈 앞이다. 그 날도 난영이는 붉은 색 티셔츠와 하늘색 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요즘 유행하는 리본 모양의 큐빅핀을 예쁘게 꽂고 선생의 침실 한켠에 앉아 있었다.

요새는 선생이 ‘곱게 돌보는 자식’이 둘씩이나 더 늘었다.

“누가 곰인형을 선물했어요. 그 녀석이 혼자 심심할까봐 작은 곰인형 하나를 더 샀지요. 난영이랑 그 녀석들 키우는 맛에 살지요.”

곰인형 두 마리는 사이좋게 선생의 것과 같은 연갈색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눕히면 눈을 감을 수 있는 난영이와 달리 곰돌이들은 눈을 감을 수가 없어서, 선생은 곰돌이들의 ‘숙면’을 위해 안대를 준비했다.

문득 선생의 세례명이 ‘프란체스코’ 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중세시대의 성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자기의 설교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자 물고기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물고기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작은 생명과 사물에게도 널리 사랑을 전하는 존재라 ‘프란체스코’일까.

그는 딸 생각이 간절해지는 지 손사래를 치며 “이런 얘기 그만하자”며 화제를 바꿨다. 나이가 들면서 옛 기억이 더 또렷해진다는 선생은 옛날 동아일보의 서울 화동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제일고보 (훗날의 경기고) 앞 화동에 다 쓰러져가는 한옥이 그 때 동아일보였어. 비뚤어진 기둥에 전화가 소나무에 버섯 달린 것처럼 있었지.”

눈 앞의 광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더해져 아파트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춘원 이광수가 편집국장으로 있었을 때, 경성고보에 다니던 나를 집에 들였지. 3년여를 춘원 바로 곁에서 지냈어요. 내가 전화 있는 방에서 잠을 잤는데, 신문을 관할하던 총독부 도서과에서 밤이고 낮이고 전화가 왔어요. ‘윤전기 멈춰라. 삭제해라. 내일 조간은 발행 못한다’ 등등…. 정간조치도 숱하게 내리고…. 그러니 동아일보의 역할이란 굉장했어. 그때 총독부 기관지만 남아있었으면 과연 어땠을까.”

선생은 ‘수필가 피천득’보다는 ‘시인 피천득’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시만이 전할 수 있는 울림을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사진작가는 ‘나의 사는 기쁨은 피선생의 시를 한 번 더 읽기 위해서’라고 고백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순간’을 좋다고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너’라는 시를 좋아해요.”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한 얘기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아서’ 70년대 이후로 수필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도 가끔씩 시상이 떠오를 때면 시를 쓴다.

나오는 길에 다시 돌아본 선생의 자택은 간소하고 소박했다. 옆집에서 시끄러워 한다고 벽에 못을 박지 않아, 거실벽에 기대 세워둔 몇 점의 액자와 화분들. 낡은 소파와 4인용 식탁. 식탁은 의자와 짝이 맞지도 않았다.

“지나다니는 길에 누가 내다버린 식탁과 의자가 있길래, 보고 가지고 왔지요.”

아파트 밖까지 따라나온 선생은 봄바람에 흔들리는 연두빛 싹들을 보며 ‘봄이 좋다’고 나직히 읊조렸다. 선생이 중년에 쓴 ‘봄’이란 수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40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작은 축복은 아니다. 더구나 봄이 40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 고백

지은이:피천득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 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