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 (1)단군신화-마니산 참성단과 인각사

  • 입력 2002년 4월 21일 17시 26분


참성단(왼쪽)과  그 곳으로 오르는 돌계단길
참성단(왼쪽)과 그 곳으로 오르는 돌계단길
《동아일보 학술전문기자인 김형찬 박사(철학)가 한국철학이 살아 숨쉬는 현장을 찾아 길을 떠났다. 단군이 천제(天祭)를 지냈다는 인천 강화의 마니산 참성단부터 서울 장안의 지식인들이 세상사를 논하던 종로거리, 조선 성리학이 꽃을 피웠던 전국 각지의 서원, 올곧은 선비들의 사상이 완성된 반도 남단의 유배지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문화와 철학의 용광로가 돼 온 한반도를 돌아보며, 우리의 삶과 국토 곳곳에 스며 있는 한국철학의 모습과 그 의미를 주 1회씩 연재한다. 》

1000개의 돌계단을 밟으면 하늘이 열린다. 구백여 개는 마니산(摩尼山) 참성단(塹城壇)까지, 나머지는 참성단에서 저 하늘나라까지.

“어디 가시나요?”

“단군 할아버지 뵈러 참성단에 갑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정말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믿으세요?”

“그게 뭐 사실이겠어요? 하지만 굳이 부정할 것도 없잖아요.”

하늘로 오르는 그 계단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쌍쌍이 손을 잡거나 가족끼리 서로 팔을 끌어주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 개의 계단을 오른다.

강화의 들녘과 서해가 눈 아래 펼쳐지는 해발 467미터의 아담한 마니산 정상. 지상에서 신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아버지 환웅을 생각하며 이 곳에서 하늘에 제(祭)를 올렸단다.

이 땅에서 우리의 철학이 살아숨쉬는 모습을 보겠다고 길을 떠나며 생각했었다. ‘한국철학의 시작은 어디일까?’ 깊으면 깊은 대로 얕으면 얕은 대로, 장엄하면 장엄한 대로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었다. 워낙 험난한 역사를 속에서 고대 문헌을 대부분 잃어버린 우리로서는 철학의 기원이라며 밀레토스학파를 내세우는 그리스나, 갑골문까지 간직하고 있는 중국과 달리 오랜 옛 사람들의 사유를 엿볼 자료가 거의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이런 경우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철학이든 역사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우리의 시작은 언제나 ‘단군신화’다.

‘옛날옛적 하늘나라의 왕자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을 굽어보며 지상으로 내려가 살고 싶어했다. 임금인 환인(桓因)께서 아들의 뜻을 아시고는 인간들이 사는 모습을 내려다보니 그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그나마 왕위를 이어야 할 맏아들이 한눈팔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환웅을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 지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인간이 된 곰과의 사이에서 아들 단군왕검(壇君王儉)을 낳았고, 단군왕검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을 건국한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단군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해진다. 그러나 환웅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 이 세상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하늘나라의 임금이 보기에도 ‘널리 인간들을 이롭게 할 만하다(可以弘益人間)’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 괜찮은 상황이었다. 하늘나라의 왕자까지 내려와 살고 싶어했으니까.

그러나 이 신화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 됐다. 환웅과 단군이 만들었다는 체계 잡힌 농경사회의 ‘이상국가’는 어렸을 적부터 우리의 의식 심연에 새겨진다. 수백 년 간 새로운 옷을 입고 재현되는 단군 관련 논란들조차 우리 의식 속에 단군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얼마나 깊이 스며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또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환웅이 처음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에 갈 수 없어 찾아간 곳은 ‘강화도’.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맞댄 요충지였고 고려시대에는 몽고에 맞서 항쟁을 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난을 피해 도망쳐 왔던 곳이고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이 조선을 침탈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하필이면 단군은 우리민족의 뼈아픈 역사를 압축적으로 간직한 상처투성이의 강화도에 제천단(祭天壇)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최근 새로 제작한 일연의 영정

평양지역 부족의 신화였을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 전체의 시조신화로 자리잡는 과정은 험난한 세월 속에서 우리의 민족의식이 형성되는 것과 그 역사를 같이 한다. 1145년 유교의 합리적 역사관을 표방하며 ‘삼국’만의 역사를 서술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완성된 지 약 140년 후, 일연(一然·1206∼1289)은 민간에 전해지는 신화, 설화, 민요 등을 풍성하게 담고 고조선 이래의 민족사를 담은 ‘삼국유사’를 지었다.

이 두 저술의 사이에는 유교와 불교라는 사상적 간격만이 아니라,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입과 그에 대한 항쟁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가로놓여 있다. 처참한 대몽항쟁을 겪은 일연으로서는 잔멸해 가는 민족사의 기록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대몽항쟁기에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영웅서사시를 엮은 이규보나, 일연과 거의 같은 시기에 단군신화를 ‘제왕운기’에 수록한 이승휴 등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일연은 당시 희미하게 전해 오던 삼천여년 전의 일을 처음 우리의 기록으로 남겼다. 참성단에서 단군의 ‘신화’를 만날 수 있었다면 ‘역사’로서의 단군은 일연에게서 시작된다.

운문사 범종루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범종 법고 목어 운판 소리가 울려퍼진다.

‘역사’로서의 단군을 만나기 위해 일연이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던 경북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로 향했다. 관광지 냄새가 물씬 나는 운문사 입구에 들어서자 절 문 앞까지 잘 닦여진 길과 봄나들이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이 절의 ‘풍요로움’을 전해준다. 다만 아침 저녁 산사 초입의 범종루(梵鍾樓)에서 울려퍼지는 범종과 법고와 목어와 운판의 장중한 향연이 호거산(虎踞山) 일대에 모여든 중생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해줄 뿐이다.

충렬왕의 총애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일연은 1277년 72세에 운문사 주지가 됐고, 임금의 부름을 받고 4년만에 그곳을 떠나기 전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광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이 거대한 비구니 사찰은 더 이상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의 후광을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하다.

“일연스님이요? 이곳에서 머무셨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 흔적은 없어요.”

담담하개 이야기하는 비구니스님의 말대로, 이곳에서 일연을 기억할 만한 자취라고는 그가 “1250년에 이곳에 주지로 주석했다”고 적혀 있는 입구의 잘못된 안내판 하나뿐이다.

일연의 흔적을 되살리려는 애타는 노력을 볼 수 있는 곳은 일연의 마지막 거처였던 인각사(麟角寺)다. 경북 군위 팔공산자락의 산길을 굽이굽이 돌다 보면 908번 도로 옆에서 ‘인각사’를 만난다. 1283년 국존(國尊)에 오른 일연은 그 이듬해에 이 산골의 절로 왔다. 이 곳에서 국존 일연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신화와 설화, 그리고 잊혀질 뻔했던 향가 14수를 기록한 ‘삼국유사’를 완성됐다.

인각사 석불좌상

하지만 인각사는 국존이 머문 곳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본당 역할을 하고 있는 극락전(極樂殿)과 조그마한 강설루(講說樓)가 버티고 서 있고 약 2년 전부터 시작된 인각사지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최근에 지은 건물 두 채가 그나마 사찰의 모습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을 험하게 견뎌 낸 석불좌상과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 보각국사비, 처참하게 조각난 채 발견돼 시멘트로 보수된 미륵당 석불좌상 등 일연을 떠올리게 하는 유적들이 새로 지어진 건물들과 함께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각사 주지 상인(常仁)스님은 국존이 된 일연이 그곳에 내려오게 된 사연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머니 때문이었지요.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기 어려울 정도로 몹쓸 병에 걸린 95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국존의 몸으로 이 시골에 와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마지막 1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신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일연은 인각사를 떠나지 않았고, ‘삼국유사’를 완성하고는 1289년 84세로 이곳에서 입적했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단군’은 천의 얼굴을 가지게 된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단군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우리 민족의 생생한 문화와 사유방식을 담으려는 고려후기 지식인들의 의식을 반영했다면, 권근의 ‘응제시(應製詩)’(1396)나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지리지(地理志·1454) 등의 단군 관련 기록은 민족의 구심점을 마련하려는 그 시대의 의식과 노력을 담았다.

일제시대에 등장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대종교, 진위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장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단기고사’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군상을 세우겠다는 사람들과 그 단군상의 머리를 잘라내는 사람들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단군신화는 언제나 그 시대의 옷을 입고 태어났다.

‘널리 인간들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는 환인의 뜻은 ‘우리는 홍익인간이란 훌륭한 사상을 간직한 특별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되어 단일민족이란 ‘신화’를 만들어냈고, 이 민족의 신화는 우리의 삶과 생각 속에 깊이깊이 스며들어 거대한 중국 옆에서 자존심 강한 ‘민족’을 지켜내는 ‘기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제는 단군도 새로이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 아직도 단군신화가 필요하다면, 이제는 정말로 ‘널리 인간들을 이롭게 한다’는 보편 사상의 상징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땅에 켜켜이 쌓인 우리 철학의 흔적을 찾아 인각사를 떠났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글

김형찬(39)

△고려대 국문학과 및 철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철학박사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 박사후 과정

△현재 동아일보 학술전문기자

▼사진

오철민(33)

△성균관대 미술교육과 졸업

△‘미디어오늘’ 사진부 기자

△현재 ‘녹두스튜디오’ 대표

△다큐멘터리 ‘한국의 굿’ 작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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