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

  • 입력 2002년 4월 5일 17시 38분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마이크 대시 지음/정주연 옮김/334쪽/1만4000원/ 지호

‘유럽의 한 귀족 가문이 소장해 온 렘브란트의 말년작이 소더비 경매에서 수십억원대에 낙찰됐다’는 식의 기사를 심심치 않게 접하곤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다 할 기능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미술품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리는지 의아스럽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미술사 분야가 상당히 인기를 끄는 전공으로 떠올랐고, 유력 재벌가의 며느리쯤 되면 애장품을 모아 갤러리를 차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들고 있는 듯하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외견상 양파나 별반 차이가 없는 튤립의 구근이 당시 렘브란트의 최대 걸작인 ‘야경’의 서너배 값으로 팔리는 사태가 빚어졌다. 왜 튤립이 투기의 대상이 됐고, 왜 하필 네덜란드였을까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캠브리지 출신의 역사학자인 마이크 대시는 ‘튤립광(Tulipomania)’이라는 원제의 책에서 중앙아시아의 고원지대에서 발원해서 16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을 매료시키고, 이후 북유럽의 네덜란드로 건너가 투기열풍을 일으킨 튤립의 역사를 서사시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책에선 숭배에 가까운 투르크족의 튤립 신앙과 콘스탄티노플에 들렸다 잘 차려진 튤립 정원을 보고 서방 상인들이 받은 문화적 충격, 이의 식물학적 복제와 분류에 평생을 바친 한 학자의 인생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마 역사물에 관심이 있는 영화감독이라면 한번쯤 영상화를 시도하고 싶을만큼 시대와 인간이 교차하는 흥미진진한 한편의 드라마이다.당시까지만 해도 서방인들에게 튤립같은 희귀종 식물은 먹거리나 약재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의 화려한 문화를 접한 서방 상인들은 튤립을 당대 문명의 절정으로 소개하기 시작했고,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활발한 인도양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서방의 신흥 부호들은 천박한 부의 증식 과정을 문화와의 교배를 통해 위장하고픈 충동에 빠져 들었다. 마침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무적 황제 펠리페 2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토착 섬유 산업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했고, 수도 암스테르담은 식민유럽의 자본이 총집결하는 국제무역·금융센터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뭔가 인간의 투기적 충동을 자극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금융사가들은 1630년대 네덜란드의 튤립 열풍을 역사상 최초의 버블(거품)로 기록한다. ‘광기의 향연’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버블은 특정 자산의 가격이 본래의 가치 이상으로 과대 팽창하는 경제현상을 의미한다. 인간들의 군집적인 투기 가담으로 인해 자산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가 실제로 자산가격을 끌어올림으로써 ‘예측의 자기실현’이 이루어진다는 매커니즘이 바로 버블의 본질이다.

이후 일순간의 튤립 가격 폭락으로 인해 심각한 불상사를 경험했지만, 인간의 투기행각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주식, 부동산, 외환시장은 거대한 투기장으로 변모했고, 버블의 발생과 파열이 교차하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끊임없이 경제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1997년 말 우리나라를 엄습한 외환위기의 배후에는 동아시아를 ‘신흥시장’이라고 규정짓고 투기행렬을 조장한 초국적 자본의 광기가 작용했고, 19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마감한 일본경제의 장기침체는 주식, 부동산의 역버블로 빚어진 것이다.

이처럼 실물경제의 순환과정으로부터 이탈한 유휴 자본의 축적은 무언가를 진홍빛 튤립으로 규정하게 마련이고, 이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버블의 파열과 함께 일자리 파괴, 부와 소득의 양극화라는 사회적 파탄으로 귀결되고 있다. 시장에 대한 맹신이 왜 사회를 배반하는 것인가를 적시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일 것이다.

이 찬 근 시립인천대 교수·무역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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