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책]'거울'의 저자 원성스님을 찾아

  • 입력 2002년 1월 24일 16시 19분


평생 동자승처럼 남아있을 것 같은 ‘풍경’과 ‘거울’의 저자 원성(圓性)스님. 세월은 빨라 그가 벌써 만 삼십이 됐다.

그를 본 사람들은 세 가지에 놀란다고 한다.

우선 그가 동안으로 비쳐온 ‘얼굴’에도 불구하고 182cm의 건장한 체구라는데 놀라고, 그저 맑고 순수하기만 할 것 같은데 달변에다 유머도 잘하는데 한번 더 놀란다. 그러면서도 곁에 있으면 풍겨나오는 그윽한 인향(人香)에 또 한번 놀란다.

우리가 그의 그림속의 귀엽고 예쁜 순수 그 자체의 동자승을 그와 동일시하면서 그가 늘 동자승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사이 그는 어느덧 내면의 성숙을 도모하는 삼십대 승려로 들어서고 있었다.

19일 충남 괴산군 조항산 자락의 다보사(多寶寺).

인터넷 팬클럽 회원 50여명과 함께 2박3일간의 겨울수련회를 여는 원성스님과 하루를 같이 보냈다.

그는 이제 아이같다기보다 여자같다. 하늘에 별이 가득찬 늦은 밤까지 회원들을 하나씩 불러 고민을 들어주는 섬세한 마음이 그렇고 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어투가 그렇다. 법문을 하면서 “‘베네통 칼라의 원색 우산’이 유행하다가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투명한 우산’이 유행하고 다시 ‘메탈적인 칼라의 우산’이 유행하더라”고 말할 때 그 감수성이 또 그렇다. 심지어는 바쁜 수련회 일정으로 피로가 쌓여 혹시 자신의 안색이 나빠지지나 않았나 불쑥 걱정을 꺼내놓기도 한다.

그의 전생에 대한 기억속에는 여자의 몸으로 피아노를 치기도 하고 아이를 낳는 경험도 들어있다. 실제 생활에서도 혼자 요리해 먹는 것도 좋아하고 빨래나 설거지도 잘한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을 보고 느끼는 여자같다는 느낌에 개의치 않는다. “깨달음에 생사를 건 비구(남자 승려)의 본 모습은 투박함과 거침에 있지 않나”라고 물었을 때 그는 “공부를 많이 한 노스님의 모습은 오히려 마음 넉넉한 아줌마의 모습”이라며 “가야산 호랑이로 알려진 성철스님의 말년이 그랬고 또 오늘날의 백양사 방장 서옹스님이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진정한 도(道)에는 성을 넘어서 도달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가 동자승이나 노스님의 모습에서 도의 성취를 발견하는 것은 그들이 남성의 정체성을 벗어나 여성에 가까워져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남성은 남성을 조금 버리는 것. 그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다. 불교의 도는 “호쾌한 댓바람보다 향긋한 차향기의 승풍에 가까운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원성스님에게는 늘 어머니의 그림자가 보인다. 어린 시절 불심깊은 어머니를 따라 절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머니가 주인이나 다름없었던 그 절에서 스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노래도 배우고 그림도 배우고 태권도도 배웠다. 고등학교 2학년인 16세에 출가를 결심한 것도 어머니의 간곡한 바람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곁을 떠나는 것이 어린 그에게는 가혹한 것이었지만 슬퍼하는 그 앞에서 너무 좋아하는 어머니를 보고 출가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가 이후에 쓰여진 그의 시에는 늘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그는 지금 다시 어머니와 함께 서울 돈암동의 대불정사라는 절에 살고 있다. 그곳은 몇해전 어머니가 출가해 세운 절이다. 그는 책을 통해 어머니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지만 어머니와 오래전에 헤어진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동자승 그림과 시가 어우러진 책 ‘풍경’을 내서 일약 유명해졌고 인터넷업체인 ‘다음’의 TV CF모델로 나와 얼굴이 널리 알려졌으며 현재 수만명에 달하는 국내외 열성팬을 갖고 있는 원성스님.

그러나 승려의 계보를 따지는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는 당혹스런 존재다. 흔히 조계종 승려라 하면 유명한 누구의 상좌 혹은 손상좌인지, 그래서 어느 문중에 속하는 지가 나와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런 게 없다.

그가 어린시절 다녔던 북한산 대원사나 어머니가 세운 대불정사는 모두 조계종에 속하지 않은 절이고 그가 출가한 수락산 학림사의 은사 도원스님도 조계종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동자승 그림의 독특한 세계를 개척한 그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절집의 그림이라 하면 불모(佛母)라 불리는 노스님으로부터 도제식으로 탱화나 선화를 배우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그런 스승을 갖고 있지 않다. 굳이 스승을 찾아본다면 학교 다닐 때 보고 큰 감동을 느낀 오귀스트 르누아르나 구스타프 클림트 등의 그림이다.

스승이 있는데 그 밑에 젊은 상좌가 부각되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조계종에서 이런 ‘계보 없음’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도움이 됐다. 함께 해인사 강원을 나온 ‘계보 있는’ 문중의 도반(道伴)들이 문중의 오랜 전통에 따라 대부분 선방으로 들어가 면벽좌선하고 있을 때 그는 중앙승가대에 진학했다. 그의 동자승 그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그가 95년 중앙승가대에서 연 전시회가 우연히 화제가 되면서부터다.

성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동양미가 물씬 풍기는 그의 동자승 그림은 이탈리아 밀라노, 미국 뉴욕, 독일 베를린 등 서구에서도 전시회를 통해 큰 인기를 끌었고 올 4월에는 호주 시드니에서도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서구에서의 인기는 다시 역류해 그를 최근 한류(韓流)의 또다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작년 대만 불광사 주최로 전시회가 열린 것을 비롯해 올들어서는 ‘풍경’이 번역돼 출간됐다. 그는 2월중 대만에서 ‘풍경’의 중국어판 출간을 기념한 기자회견과 팬사인회를 가질 예정이다.

원성스님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연예인처럼 팬클럽을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스님이 됐다. 그에게 신도가 있다면 바로 그런 팬들이다. 팬들은 꼭 불교신자는 아니다. 이날 수련회에 참석한 회원중에도 절반가량 기독교도이거나 종교가 없는 이들이다. 팬들중 과거 그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좋아했던 소녀들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나와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런 느낌이 애초 나라는 사람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 자신은 젊은 시절 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용운의 ‘님’은 사랑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살아오면서 어머니 외에 그리워해본 여자가 있었는가”라고 묻자 그는 “이성으로 좋아해본 여자는 아직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미팅하러 가자고 할 때도 나는 왠지 산에 가서 꽃이나 나무를 보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영화 ‘리틀 붓다’에 나오는 키아누 리브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남녀의 성적 구별을 모호케하는 중성적 특징이라든가, 천성적인 고귀함으로 사춘기와 같은 성장기의 한 단계를 뛰어넘는 비약 등이 그렇다. 그는 조선시대의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남성중심적이 되고 터프해진 불교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타입의 승려다.

“스님, 세상에 텔레파시가 있나요?”

누군가 법문시간에 질문을 하자 그는 동화같은 얘기를 들려줬다.

“있고 말고요. 우리 신체에서 송신과 수신 기능이 가장 강력한 곳이 어딘지 아세요. 그건 머리카락이에요. 머리카락은 머리 위로 안테나처럼 솟아 있잖아요. 여자들이 왜 예민하고 예지력이 좋으며 남자들의 속생각도 잘 들여다 보는 줄 아세요. 그건 머리카락이 길기 때문이예요. 그러나 머리카락은 온갖 잡된 신호가 걸러지지 않고 잡히는 곳이기도 하죠. 그래서 머리카락은 무명(無明)의 근원이라고도 해요. 스님들이 머리를 깎는 것은 바로 머리카락을 통해 잡히는 잡된 신호들, 잡념들을 없애기 위해서랍니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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