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柑橘(감귤)

  • 입력 2002년 1월 15일 17시 56분


약 20여 년 전만 해도 바나나가 무척 귀했다. 수입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시설재배로 생산했는데 모양새가 괜찮은 것은 백화점에서 고가에 팔렸고 작고 흠집 있는 놈들은 가려내 길거리에서 팔기도 했지만, 그래도 값은 만만치 않았다. 손가락 만한 크기에 그나마 반쯤은 썩은 것 한 개에 천 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뒤 운 좋게도 바나나가 지천인 나라에 留學(유학)을 가서 그 날로 연속 몇 끼를 온통 바나나로 때웠던 기억이 있다.

다시 한 15년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번에는 귤도 무척 귀했다. 아직 대량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는지 내륙의 시골에서는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1970년대 넘어 생산량도 늘고 가격도 좋아 좀 과장되기는 했지만 귤 한 그루로 아들을 대학까지 보낸다고 하여 ‘대학나무’라는 이름도 붙었다. 80년대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구정치인들의 부정을 파헤치면서 모 정치인이 제주도에 수십만 평의 柑橘농장을 가지고 있다 하여 人口에 膾炙(회자)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귤이 재배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단정할 수 없지만 여러 기록으로 보아 신라시대 초부터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耽拏(탐라)로부터 柑橘을 歲貢(세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柑橘이 宗廟(종묘)에 바치는 중요한 과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10월이면 柑橘을 바쳐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柑橘은 제사목적 외에 왕궁이나 고관들의 빈객 접대용으로도 매우 요긴하게 쓰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생태상 바람과 추위를 싫어하고 병충해가 많아 재배하기에 여간 까다롭지 않아 가장 어려운 농사중의 하나가 바로 柑橘농사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도 上林園(상림원) 別監(별감)을 전라도의 남해안 지방과 제주도에 보내 시험재배를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조정의 요구는 줄지 않았으며 혹 못된 수령이라도 오는 날이면 이를 빌미로 수탈을 자행하니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매년 7, 8월이면 일일이 나무를 순시하면서 열매의 숫자를 적는가 하면 꼬리표를 달아 하나라도 없어지면 엄한 벌을 주었다. 이 때문에 민가에서는 귤나무를 통째로 뽑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 귤이 과잉생산으로 가격이 폭락했다고 한다. ‘대학나무’는 옛말이 되고 이제는 ‘시름나무’가 된 것이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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