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낸 고3엄마-담임 탄식과 희망의 말말말…

  • 입력 2001년 12월 10일 18시 08분


2002학년도 정시모집 원서접수가 10일부터 전국 192개 대학에서 일제히 시작됐다.

학부모와 선생님들은 지난해에 비해 수험생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폭락했고, 수능 전국 석차가 일절 공개되지 않은 상태여서 어느 해보다 애를 태우고 있다.

‘원서를 사들고 나서 눈썹 끝이 타들어가는 심정’이라며 초조함을 호소하는 어머니와, 수험생이 일찌감치 수시모집에 합격해 느긋하게 ‘표정 관리’에 들어간 어머니 등을 모시고 원망과 한탄, 희망과 기대 등을 들어봤다. 이 자리에는 고교 3학년 담임선생님 1명과 입시학원의 원장 1명도 참석했다.

#요즘 입시 너무 힘들어요

-올해 수험생은 ‘이해찬 1세대’라고 하더니 시작부터 끝까지 실험만 당하다 끝나는 느낌입니다. 전국 석차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학 교수 한 분이 만들었다는 복잡한 ‘석차 산출 공식’을 놓고 아이들과 머리를 싸매고 있지만 전자계산기를 가지고도 계산이 안 되네요(한숨).

-올해 고3 엄마들은 그래서 슈퍼마켓에서 ‘해찬들’ 고추장만 봐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잖아요. 애들이 자신감을 잃고 기도 많이 죽은 느낌이에요.

-모의고사도 못 보도록 무장해제시키더니 결국 ‘어려운 난이도’로 확인 사살한 셈이죠.

-고3 담임은 장가갈 수 있는 날이 수능시험 직후밖에 없습니다. 수능날 한창 막바지 결혼 준비 때문에 집안 어른들을 뵙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쉴새없이 울렸습니다. ‘어쩌면 좋으냐’고 무작정 우시는 어머니들을 달래는 게 아이들 달래는 것보다 더 힘들었어요.

-대학별 입시요강이 너무 복잡해 전문학원에서 상담지도를 한 선생님들도 개별 대학의 입시정보를 정확히 모릅니다. 교사도 모르고 학생도 모르면서 날짜 닥치면 원서 넣는 게 요즘 입시죠. 옛날에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했지만 요즘 학원가에서는 ‘운구기일(運九技一)’이라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기본만 가르치고, 심화학습 보충학습은 애들 보고 알아서 하라는 건데, 그게 고등학생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생긴 것 같아요.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 학교 들어갈 땐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있어서 변별력에도 큰 불만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고3 때만 정신 차리면 좋은 대학 갈 수 있었잖아요. 요즘 애들은 너무 어릴 때부터 제도권 교육에 묶이는 것 같아요.

-뭐, 그때라고 다 좋았겠어요. 엄마들 욕심이 갈수록 커지니까 이렇게 됐겠지요.

-과외 싫다고 캐나다 이민 갔는데, 거기서도 아들딸한테 영어 수학 과외시키는 게 한국 학부모래요.

#엄마는 ‘입시전쟁”의 CEO

-기업에서 최고경영자(CEO)가 중요한 것처럼 요즘 고3 엄마들은 아예 ‘전략가’가 돼야 해요. 대학별로 영역별 가중치가 얼만지, 과탐(과학탐구), 사탐(사회탐구) 점수는 얼마나 필요한지 눈이 빠져라 살펴야 합니다. 요즘 원서 접수는 신경쓸 게 한두 개가 아니어서 ‘종합예술’이라고들 하잖아요.

-대학별로 입시가 세분화되니까 ‘틈새 과외’도 늘었어요. 15일짜리 단기 논술과외에, 각종 면접 대비 3∼4일짜리 집중 과외, 이것저것 다 묶어서 해주는 패키지 과외, 별의별 게 다 있어요. 막판이라 가격도 만만찮아요….

-영어 특기자로 서울 중상위권 대학 수시모집에 들어간 학생의 경우 토익 토플이 거의 만점이에요. 영어도 ‘전략 입시과목’이 되니까 별 희한한 공부법이 다 나오더군요. 회사원들은 몇 달씩 외국어학원 다니면서도 영어 점수 올리기가 어렵잖아요. 하지만 요즘 입시 학원은 토플 토익의 유형을 철저히 해부해서 가르치니까 영어도 어느 정도 암기과목처럼 돼 버린 것 같아요.

-학부모들도 전쟁이지요. 대학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입학 정보 Q&A’ 코너 챙기는 게 엄마 일이 됐어요. 웹 서핑은 옛날 학부모들은 생각지도 않던 건데…. 인터넷 실력은 늘었지만, 참 별걸 다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1년 내내 조마조마한 인내심 ‘원서 접수’

-5월에 대학들이 수시모집을 시작하고 2학기인 8, 9월에 한 번 더 수시모집이 있어요. 11월에 수능을 보고 정시모집을 하기까지 사실상 1년간 ‘원서 접수’에만 매달려요.

-수시모집이 시작되면서부터 반 분위기가 달라져요. 아이들은 일단 원서를 사들고 온 대학을 ‘모교’라고 불러요. 수시모집으로 예비대학생이 된 아이와 수능 준비에 필사적인 아이들이 한 반에서 수업을 하는 거죠.

-일부러 결석한 아이들도 친구들이 “수시모집 면접 갔는데요”라고 해주면 무사 통과래요. 고3 1년간은 공부한다기 보다 입시 준비하느라 시간 다 보내는 거죠.

-1년간 들어가는 원서 값만 해도 보통이 아니에요. 5월부터 수시모집 준비하면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하도 들어갈 게 많아서 책이 한 권씩 만들어집니다. 전형료는 학교별로 6만∼7만원인데, 수시 2∼3회, 정시 5∼6회 넣으면 원서 쓰는 데만 최소한 50만원 이상 들죠. 수시모집 8번까지 넣는 아이도 봤어요.

-수시모집 추천서는 학원에서 대신 써주잖아요. 엄마, 아빠도 쓸 때가 있지요. 원칙은 안 되는 거지만.

-원칙요? 원칙이 어디 있어요, 대한민국에?

-‘수행평가’도 틀을 바꿔야 돼요. 아이들 숙제를 보면 모두 5∼7가지 유형을 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서 베껴 오니까요.

-수시모집 붙은 아이한테는 다른 아이들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일부러 잘 못 치르라고 이야기한대요. 이미 대학 붙었으니까 자기들을 위해 내신성적을 희생하라는 거죠.

-수시모집 붙은 아이들은 따로 책 읽고 자습하라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되나요. 5월에 붙은 아이들은 실제로 반년 이상 허송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아이들 입시가 끝나면 내 인생도 찾아야지

-전 쌍둥이 수험생을 뒀기 때문에 배로 힘들었어요. 한 아이를 ‘과탐 학원’에 데려다 주고 오면 곧바로 미술하는 딸 레슨 데려다 주러 가고 그랬죠. 다시 하라면 죽어도 못하겠어요. 부모나 남편한테 이렇게 공을 들였더라면 아마 국가에서 효녀비와 열녀비를 세워줬을 거예요. 정시모집이 끝나지 않아 불안하긴 하지만, 아이들이 별 무리 없이 여기까지 와주었다는 것만 해도 대견스러워요.

-아직 고2 아들이 남아 있어서 내년에도 수험생 엄마예요. 한 번 더 이 전쟁을 치러야 한답니다. 제발 올해 축적된 노하우를 내년에도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고3 엄마’ 끝나면 쉬지도 못하고 ‘고시생 엄마’되는 사람들도 많대요. 벌써부터 취업 걱정을 같이 하는 엄마들도 많고…. 하여튼 엄마들이 마음 편하게 살 날이 언제 올는지….

-전 원래 그림을 그렸어요. 외동딸이 고등학교 가면서부터 그림에서 손을 놓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요.

-앞으로 봉사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간절한 만큼 더 많이 기도하고 자주 성당을 찾았더니 제 자신이 성숙해진 느낌이에요.

-올 한 해 고3 교실을 지켜보니, 이곳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민해진 아이들이나 엄마들과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늦게까지 정시모집 상담하는 날 선생님께 김밥과 과일을 가져오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 ‘우리 교육은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인직·김현진기자>cij1999@donga.com

▼참석자▼

▽고3 엄마〓김기순(47·서울 강남구 대치동), 윤귀란(45·서울 관악구 신림동), 이선영(46·서울 송파구 송파동), 강현숙(46·서울 강남구 일원동)

▽고3 담임〓김정훈(30·신광여고 3학년 담임교사, EBS 강사)

▽학원장〓이동우(43·이동우 영어학원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