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연구자들 독립적 모임 늘어…

  • 입력 2001년 12월 3일 18시 12분


‘연구를 위해 대학 밖으로 나간다.’ 연구와 가르치는 일이 대학의 근간임을 상기한다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대학 내에서 인문학 존폐 위기가 공공연히 거론돼온 지난 몇 년간 대학 바깥에서는 연구자들이 새로운 지적 생산과 소통의 모델을 만들어왔다.

연구자들이 대학 울타리를 넘어 학교 밖에서 연구와 강의를 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강의를 듣는 ‘대중’ 층이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최근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동체인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등의 일반 공개 강의에는 강의실이 비좁을만큼 수강생이 넘쳐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학부제 도입, 신자유주의적 평가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문학 연구자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도 연구자들의 ‘공부’를 부추기는 요인. 두뇌한국21(BK21) 등의 영향으로 프로젝트 중심으로 돌아가는 연구풍토에서는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일관되게 유지하기 어렵다. 끝까지 연구자로 남기로 한 사람이라면 관심사를 공유할 사람들을 모아서 스스로 연구의 중심을 잡아나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최근의 연구자들이 학교 바깥에서 만드는 연구집단은 △대학에서 못하는 연구의 빈 부분을 채우거나 △교수 임용 전에 예비교수들이 거쳐가는 대기소가 아닌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연구공동체 △대중교육을 목적이자 존립의 근거로 삼는 연구조직 등의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학교 밖의 연구 모임이 결코 대학 밖과 안을 이질화시키거나 대치하는 형국으로 몰고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학교밖 연구공간에서 강의를 하거나 강의를 듣는 현직교수들이 늘어나는 등 소통이 활발해지고 있다.

▼삶의 모델을 바꾼다-'수유연구실+연구고간 너머'▼

고미숙 박사 등 한국고전문학연구자 중심의 수유연구실과 이진경 박사 등 사회과학 연구자 중심의 연구공간 ‘너머’가 합친 것은 2000년 봄. 서울 대학로의 한 빌딩 4, 5층으로 공간을 확대해 이사한 것은 2000년 7월이다.(http://www.transs.pe.kr). 학계는 이들이 대학에 재정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이 연구소의 재정내역은 회원들에게 상세히 공개된다. 11월의 살림 내역을 보면 임대료 534만원이 가장 큰 지출. 반면 수입은 이 연구소 안에 자기 자리를 갖고 있는 42명의 일반회원이 3만원부터 30만원까지 형편껏 내는 일반회비와 책을 출판했거나 장학금을 받은 회원들이 쾌척하는 특별회비로 충당됐다. 11월의 가계부는 흑자.

“운영 1년을 넘겼는데 소요경비는 일반 회원이나 세미나에 참여하는 회원들의 회비, 대중강연 수입 등으로 그럭저럭 꾸려간다. 자립적인 운영이라는 시험대는 통과한 것 같다”는 것이 이진경 박사의 설명이다.

이 연구소는 회원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동연구실, 세미나실, 식당, 운동할 공간 등 연구와 생활에 필요한 기본 여건들을 갖추고 있다. 그것도 실비에 해결할 수 있도록하는 자급자족 체제다. 연구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곳에서 최저비용으로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

그러나 생활의 편의만이 이 공간에 현재 40여명의 석·박사급 연구자들이 몰려든 이유는 아니다. 이 곳의 연구자들은 사회학 수학 건축 러시아문학 국문학 등 전공이 다른 사람들이 수시로 접촉하며 지적인 시야를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을 최대 장점으로 꼽는다. 그런 점에서 회원들이 연구내용을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는 ‘화요토론회’는 이 연구공간을 굴려가는 핵이다.

“공동체성을 얘기하면서 그 공동체의 성원을 내부사람에만 제한하는 폐쇄성을 갖는 것은 모순이다. 다른 곳에 소속된 연구자나 학교와도 열린 소통의 구조를 만들어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 연구소의 또다른 비전이다.”(이진경 박사)

▼거리의 철학도들을 낚다-철학아카데미▼

“이제는 대중철학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감이 좀 오는 것같다.”

이번 겨울로 여덟번째 대중강의를 갖는 철학아카데미(www.acphilo.co.kr) 이정우 원장(전 서강대 교수)의 고백이다.

오로지 철학만을 고집하는데도 8주단위로 진행되는 한 학기 강의의 총 수강생이 평균 300명 선이다. 주의깊게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인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빌딩 7층에 철학아카데미 강의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성과다.

지난해 4월 문을 연 철학아카데미의 수강생은 대학생과 직장인 등 크게 두 부류. 강의는 초보자를 위한 입문용, 어느 정도 기초개념이 정리된 사람을 위한 일반용, 연구자들을 위한 중국어 독일어 원전독해 등의 특별강좌로 구성돼 있다.

아무리 ‘땅으로 내려온 철학’이라고는 하지만 강의 주제들이 만만치 않다. 17일 시작되는 겨울학기 입문용 강의에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서양 미학의 역사를 강의하는 ‘아프로디테의 탄생’(담당 진중권), 20세기 현대 서양철학의 갈래를 베르그송부터 가타리까지 훑은 ‘현대 서양철학의 파노라마’(담당 이정우) 등이 있다.

대학강의에서는 맛볼 수 없는 세부적이고 집중적인 접근이 철학아카데미 강의의 특징. 이원장은 “대학에서는 같은 강의록으로 몇 년씩 강의해도 학생들이 바뀌기 때문에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 자기 돈 내고 들으러 온 철학아카데미의 수강생들 앞에서는 그런 무성의가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중강의가 자리잡으면서 생겨나는 또 하나의 현상은 매력적인 강의로 고정적인 수강생을 확보하는 연구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 철학아카데미만해도 메를로 퐁티의 몸현상학 등을 공부한 프랑스 철학 연구자 조광제, 정신분석학과 라캉을 연구한 홍준기 박사 등이 손꼽힌다. 독일철학 연구자인 김상봉 박사의 경우 강의록이 녹취돼 한길사에서 꾸준히 책으로 발간되고 있다. 02-722-2870

▼국가도 못하는 원전 해독에 나선 연구자들-정암학당▼

“OECD 가입 국가 중에 플라톤의 고전이 완역되지 않은 나라는 한국 뿐이다.” 선친이 남긴 사재로 정암학당을 개설한 그리스 고전철학 연구자 이정호 교수(방송통신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정암학당은 그리스철학 전공자들이 모여 부실한 고전 연구의 기초를 새롭게 다지는 모임. 학당장인 이 교수를 비롯해 서울대 김남두, 동국대 양문흠, 건국대 기종석 교수 등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매년 4명씩 펠로우를 선발하고 소정의 연구비를 지원한다.

정암학당의 세미나 스타일은 철저한 강독. 학당의 고전학 연구실장인 김인곤 박사는 “고전철학의 경우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 자신의 언어로 소화해내는 작업이 연구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했다. 정암학당 참여자 18명은 그리스어 강독을 할 수 있는 수도권의 고전철학 연구자가 거의 망라된 숫자. 향후 5년 내에 플라톤 대화편의 그리스 원전 완전독해를 목표로 이미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필레보스’의 강독을 마쳤다.

정암학당이 간판을 내건 것은 2000년3월이지만 실제로 강독모임이 시작된 것은 1997년.

이들의 강독스타일은 동료 철학자들도 고개를 내저을 정도다. 학기 중 금, 토 이틀간 열리는 세미나는 오전 10시에 시작해 12시간 동안 마라톤식으로 진행된다. 방학 중 강원도 횡성에 마련된 학당에서 2주간 진행되는 세미나도 일정이 빡빡하기는 마찬가지다.

김재홍 박사(가톨릭대 인간학연구소)는 “정암학당의 공부방식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부터 수행된 ‘공동작업’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철학 전공자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놓고 있다. 02-3668-4541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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