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절제된 언어로 엮은 현대시조 유재영씨 '햇빛시간'

  • 입력 2001년 11월 25일 18시 19분


“모두들 / 말이 없다 / 귀를 싸고 말이 없다 / 갈겨 쓴 소문들은 떠돌다 잠이 들고 / 광장엔, 누군가 버린 / 구호만이 / 잡초 같다.”(유재영 ‘광장의 사나이’ 중)

얼핏 보면 현대시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는 시조다. 행갈이의 형태를 바꿨지만 3·4조의 기본 운율을 지키고 있다. 시조의 족쇄와도 같은 종장 첫 구 ‘3·5조’도 틀림이 없다.

이같은 외적 정형성 뿐만 아니라 ‘튀어나오는 초장, 펴 나가는 중장, 절제하려 애쓰는 종장’이란 시조의 내적 정형성까지 잘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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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를 현대적으로 탈바꿈하는데 앞장서온 시인 유재영씨(사진)가 시조집 ‘햇빛시간’(태학사)을 발표했다. 자유시에서도 일가를 일군 그는 몇 권의 시집을 냈지만 단독으로 시조집을 내기는 처음. 30년전 시와 시조로 동시에 등단한 그는 4인 시조집 ‘네 사람의 얼굴’(문학과지성사·1983)을 발표한 적이 있다.

‘햇빛시간’에는 우리말의 가락을 살리면서 정밀하게 마름질된 언어로 쓰인 33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기왕이면 외워서 소리내어 읊어야 청각적 이미지가 주는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연시조 ‘물총새에 관한 기억’은 현대적 시조가 갖는 미감(美感)의 본령을 엿볼 수 있다. 한마리 물총새는 인사동 좁은 골목, 농촌 유년기의 검정 말뚝, TV속 폐수의 실루엣 등 무관한 소재를 유려하게 비행한다.

시집 전체적으로는 ‘물빛’의 그리움과 ‘햇살’의 따사로움이 주조를 이루지만 주제가 다양하다. 흔히 시조작가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음풍농월한다는 통념은 해당없음이다.

앞서 ‘광장의 사나이’는 혹독한 시절에 젊음을 보낸 소시민의 ‘응고된 분노’를 잘 드러낸다.

‘그는 30대, 어느 날 광장에 서 있었다 / 추운 몸을 개털 점퍼 하나로 받치고서 / 아아아 소리를 질러… / 하공은 금이 갔어’(‘광장의 사나이’ 중)

신경림 시인은 발문에서 “정지용이 가람 이병기 시조집을 ‘관조와 총혜의 소산’이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듯이 유재영의 시조도 이렇게 일컬어져 마땅하다고 본다”고 추켜세웠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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