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교수 퇴임 강연

  • 입력 2001년 9월 11일 18시 21분


문학평론가 김윤식(65) 서울대 국문과 교수의 정년 퇴임강연이 11일 오후 3시 서울대 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강연장에는 좌석이 200석에 불과한데도 학생 졸업생 등 300여명의 청중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참석자 중에는 조동일 교수 등 동료 학자, 정호웅 권성우 성민엽 최혜실씨 등 후배 평론가, 박완서 신경숙 은희경 함정임씨 등 작가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 외로움이 글쓰기로 인도

이날 강연의 제목은 ‘갈 수 있고, 가야할 길, 가버린 길-어느 저능아의 심경 고백’이었다. 100여권의 저서를 통해 한국 현대문학 연구에 굵은 획을 그었던 김 교수는 강연을 통해 주로 그간의 인간적인 고뇌를 털어놓았다.

“저는 1936년 경남 진영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저를 글쓰기로 인도한 것은 ‘외로움’과 ‘일본인들이 만든 교과서’, 그리고 일제 근대교육 정신인 ‘물질 경시, 문화숭배 사상’이었습니다. 글을 쓰고 싶어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중도에 작가의 꿈을 접고 국문학 연구에 빠져들었습니다. 아무도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그것은 ‘겁도 없이 청무밭에 뛰어든 흰나비 꼴’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이어 “사람들은 내 비평에 대해 ‘현장비평’이라는 말을 붙여주었지만 사실상 이것은 단순한 기술이지 독창적인 발견일 수 없다”고 말했다.

◇ 비평은 필사적인 작품속 길찾기

대화체 논문체 묘사체 등 다양한 스타일의 비평을 시도한 것에 대해서는 “남들이 읽으면 ‘제 멋대로’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한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기 위한 필사적인 길찾기였다”고 설명했다.

다른 문학평론가들이 해놓기 어려운 업적을 남기고 서울대 교수가 된지 30여년 만에 명예롭게 교정을 떠나는 노교수도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 없지 않은 듯했다.

◇ 학문적 성취 '헛것'아닌가 회의도

그는 어릴적 꿈꾸었던 작가의 길을 가지 못하고 남의 작품에 대한 평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묘지기’에 비유했다. 그는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생명의 황금나무만이 녹색이다”는 ‘파우스트’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지금까지 해놓은 것이 모두 ‘헛 것’이 아닌가 회의하기도 한다고 고백했다. 김 교수는 이런 고민으로 밤을 새우던 중에 겪었던 경험을 소개했다.

“한밤 중에 서재 한 귀퉁이에서 무슨 기척이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다름아닌 제가 쓴 책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만든 피조물인 그들이 언제가 죽을 운명인 저를 아주 불쌍한 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김 교수는 한 시간 가까운 고별강의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예언자가 없더라도 이제는 고유한 죽음을 죽을 수 있을 같습니다.”

강단을 내려오는 노 교수를 향해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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