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가 귄터 그라스 대담]"작가는 늘 '敗者'와 함께 해야"

  • 입력 2001년 8월 20일 18시 29분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74)를 최근 독일을 방문한 중앙대 독문과 김누리 교수가 만나고 돌아왔다. 그라스는 김교수와 만난 자리에서 대담을 갖고 문학의 위상, 지식인의 역할, 한국의 통일 등에 대해 솔직한 견해를 밝혔다. 대담은 독일 뤼벡시에 있는 그라스의 집필실에서 이뤄졌다.<편집자>

▽김누리〓당신은 ‘참여문학’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그러면서도 독일 현대사의 정치적 굽이마다 당신만큼 적극적으로 참여한 작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라스〓‘참여문학’이라는 개념은 저를 화나게 합니다. ‘참여작가’라는 말은 ‘흰 백마(白馬)’라는 말과 같습니다. 백마는 하얗다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하얀 색깔이듯이, 문학은 그 자체가 ‘참여적’입니다. 상아탑에 숨어 들어가 세상과 현실에 대해 더 이상 아무 것도 알고자하지 않는 작가들도 나름대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이란, 그것이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세계로의 향함 혹은 세계로부터의 등돌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당신의 작품 ‘달팽이의 일기’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문학은 타협을 모르지만, 우리는 타협에 의해 살아간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는 어떠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스〓정치적으로 보면 우리는 타협에 의해 살아갑니다. 한편에는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예술적 작업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나는 우연히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한 시민으로서 참여합니다. 이때는 예술가보다 시민이 우선합니다. 어느 누가 시민으로서 참여한다면, 그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민주사회에서는 결국 타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예술적 작업이 민주주의처럼 다수결에 따라 이뤄진다면 그것은 무미건조한 평균적 작품을 낳을 뿐이지요. 문학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세계입니다.

◆ 문학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대립

▽김〓한국 문단을 보면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라스〓그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독일의 경우도 비슷하지요.

▽김〓한국의 최근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신변잡기적인 이야기, 자전적 소재 일색입니다. 시대의 현실 전체의 맥락을 거시적으로 짚어내는 서사적 안목을 가진 작가가 별로 없지요.

▽그라스〓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나이가 되면, 그리고 꼭 그러길 원한다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자전적인 것을 쓰지 않습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아주 풍성한 삶을, 모순에 가득 찬 삶을 살았어야 합니다. 너무 일찍 자기 자신에 대해 쓰려고 할 때 문학적 착시가 생겨납니다.

▽김〓한편에서는 세계화, 즉 전세계적으로 고도의 자본 집중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확산되는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 '인간' 도외시한 세계화로 자본주의 파멸

▽그라스〓이러한 현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로 19세기, 20세기의 이데올로기 중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후 자본주의는 자신을 절대화해왔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은 이같은 절대화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의 자기파괴는 시작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제 아무런 장애도,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긴 결과가 세계화입니다. 세계화의 가치들은 인간의 문제는 도외시합니다.

▽김〓문학에서 나타나는 문제의식의 결핍과 신변잡기식 글쓰기 현상도 세계화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라스〓그렇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의 퇴각이지요. 목가적인 것으로, 특수한 자아로, 자기 주술(呪術)로 퇴각하는 것은 ‘세계화’라는 거대형식이 낳은 부수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김〓당신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기형화하는 것은 이상과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과 언어가 사라진’ 오늘의 현실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스〓세계적으로 연대(連帶)라는 개념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연대야말로 우리가 사회적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전제인데도 말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을 문학의 영역과 결부시켜 얘기해 보지요. 작가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됩니다. 작가가 앉을 곳은 그때 그때의 패자들, 전쟁의 패자만이 아니라 경제적 과정, 사회적 과정의 패자들이 앉아 있는 그곳입니다. 승자에게는 옹호자들, 지지자들이 넘치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대중들이야말로 작가에겐 더욱 소중한 존재이지요. 하지만 거짓 이데올로기에 유혹당한 지식인,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 널뛰기를 하는 지식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김〓독일 통일과 관련하여 당신이 통독 과정에서 보여주신 선견지명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독일의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 통일의 전제는상호 존중과 대화

▽그라스〓통일의 전제는 분단된 두 체제가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 살고 있는 것이 그들 자신의 책임은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미국의 비호를 받은 독재정권 아래서 살았던 것이 남한 사람들의 책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 모두는 지난 세계대전의 결과였습니다. 서로 상대방과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역사에 대해, 지나온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독일인들이 소홀히 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는 ‘통합’이 되기도 전에 ‘통일’ 되었습니다. 하지만 통합이 통일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통일은 통합의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김〓한국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그라스〓한국에서는 통일 이전에 통합 과정이 상호 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독일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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