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3·1독립선언 공약삼장 만해 불교정신 담겨"

  • 입력 2001년 8월 9일 19시 00분


강원 인제군 백담사에서 8일 끝난 ‘만해축전’ 행사에서,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30)가 발표한 논문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의 집필자에 관하여’가 큰 관심을 끌었다. 박 교수는 이번 행사 가운데 하나로 마련된 ‘만해의 독립사상과 불교의 독립운동’ 심포지엄에서 이 논문을 발표했다.

러시아 출신으로 올봄 한국에 귀화한 박 교수는 유창한 한국어로 중국과 일본의 근대 사상가까지 거론하며 만해 사상의 원류를 추적해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한국계 ‘미하일 박’교수로부터 한국고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의 러시아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그는 95년 한국 여성과 결혼한 후 경희대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로 일하다가 올 3월 오슬로대학 한국학 교수로 취임했다.

1919년 육당 최남선(1890∼1957)이 쓴 기미독립선언서 끝에는 공약 삼장(公約三章)이 붙어 있다. 이 공약 삼장의 집필자와 관련해 박 교수는 “공약삼장에 나타난 자유사상이 최남선이 주장했던 국가 민족중심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공약삼장 집필자가 최남선이 아니라, 만해 한용운(1879∼1944)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박교수는 만해와 육당이 모두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집단주의적 자유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만해의 경우 육당과는 달리 불교적 정신을 통해 개인주의적 자유개념으로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만해가 영어 ‘리버티(liberty)’의 번역어인 자유(自由)를 최초로 접한 것은 양치차오(梁啓超·1873∼1929)의 저작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서.

중국 사상가 중에서 최초로 양학(洋學)을 체계화했던 양치차오의 자유사상은 존 스튜어트 밀의 고전적 자유주의보다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적 자유 이념에 가까웠다.

현실 정치인이었던 양치차오는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 민족 인종 등 단체의 자유를 우선시했으며 단체의 자유는 혹독한 약육강식형의 생존투쟁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만해는 ‘공법(公法·국제법)의 천 마디보다 대포 한 문이 더 낫다’는 서양인들의 말을 일단 기정 사실로 인정했지만 이같은 상태를 ‘야만적 문명’이라고 규정짓고 이를 극복하는 길을 모색했다. 만해는 자유의 근원을 모든 생명의 평등과 자유를 내세우는 불교 사상에서 찾으려 했다.

1918년 불교 잡지 ‘유심(惟心)’ 3호에 함께 발표된 만해와 육당의 글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만해가 정신적인 해탈을 강조한 반면, 육당은 물질적인 ‘강함’을 내세우고 있는 것.

불교적 구도 정신에 입각한 만해는 눈 앞에 독립의 현실적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타협을 거부한 반면, 물질적 강권에 매료된 육당은 일본과 타협하고 말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박 교수는 주장했다.

<인제〓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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