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 다시보기]'영원한 로맨티스트' 추종자 줄이어

  • 입력 2001년 7월 29일 18시 36분


프라하에서 공연되고 있는 '돈 죠반니'. 카사노바는 '돈죠반니'를 개사하기도 했다.
프라하에서 공연되고 있는 '돈 죠반니'. 카사노바는 '돈죠반니'를 개사하기도 했다.
카사노바는 오늘날 ‘카사노비스트’(카사노바를 연구하고 추종하는 사람들)들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유럽 각국에서 내가 만난 카사노비스트들은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며 인생을 다양한 무늬로 수놓은 카사노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를 재조명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체코 보헤미아의 둑스성은 카사노바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세계 도처에서 온 여행객들이 이 곳의 카사노바 박물관을 둘러본다. 올 봄 내가 이 곳을 찾았을 때, 안내인은 “1998년 카사노바 사후(死後) 200주년 기념일에 전 세계의 카사노비스트 200여명을 초대해 이곳에서 각종 축제 행사를 열었다”고 자랑했다.

둑스성측은 카사노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카사노바 디너 파티’를 상품화했다. 둑스성의 정원에 석양이 질 때 파티를 주관하는 사람들은 옛 로코코의 복장을 하고 나타난다. 이들은 여행객들에게 카사노바가 즐겼던 저녁식사와 음료를 정성껏 제공한다(겨울에는 파티가 없다).

이 디너 파티는 연인끼리의 행복한 식사가 인간의 성적 본능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느끼게 해준다. 또 연인들이 식사를 마친 후 갖는 열정적인 ‘둘 만의 시간’에 대해서도 예감하게 해준다.

체코 프라하는 밤이 아름답다. 그곳 국립극장의 입구에는 카사노바가 속이 훤히 들여 다 보이는 블라우스를 입고 사랑의 구애를 하는 사진이 걸려 있다. 카사노바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지아코모 카사노바’의 공연 포스터다.

이 뮤지컬에서 환상적인 현대식 무대세트와 조명 아래 카사노바 역을 맡은 배우가 여인과 관능적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황홀하다.

카사노바는 이 시대에 수준 높은 뮤지컬 속에서 다시 환생하고 사람들은 그의 사랑의 열정을 엿보고 싶어 극장 앞에 줄을 선다. 이 뮤지컬은 카사노비스트들에 의해 제작된 대표적인 예술 작품이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유명한 영화감독 펠리니는 카사노바의 삶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펠리니의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펠리니는 카사노바의 일생을 연극적인 기법으로 그려냈다. 그의 삶을 곰곰 살펴보면 차라리 광기로 가득한 한 편의 연극이지 않는가.

우리의 추억 속에는 미남배우 알랑 들롱이 주연한 카사노바 영화도 들어 있다. 이같은 영화도 결국 카사노바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제작한 것들이다.

내가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프라하의 칼스브뤼케(왕의 다리라는 뜻) 인근의 한 극장에서는 마침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죠반니’가 인형극으로 공연되고 있어 반가웠다. 이 전에도 언급했듯이 ‘돈 죠반니’는 카사노바가 모차르트를 만나 가사 쓰는 것을 도와주었던 바로 그 오페라다.

내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만난 파도바대학 파올로 교수는 카사노바를 주제로 현악 4중주를 작곡해서 프랑스에서 발표한 바 있다. 그의 부인은 베네치아 바르바리고 요리학교 주임으로, 카사노바 요리책을 낸 사람이다.

그 현악 4중주는 카사노바의 사랑에 대한 영감을 음악에 담아냈는데 그에게서 받은 CD를 듣고 우리 일행은 눈물을 흘렸다. 사랑과 삶의 우여곡절을 어찌 그리 잘 표현했는지. 만일 카사노바가 한낱 바람둥이 였다면 이런 지성인 팬들이 남아 있을까 싶다.

최근에는 미국 디킨슨대학의 에머리 교수를 중심으로 각국의 카사노비스트들이 장소를 바꿔가며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카사노바가 문학 철학 음악 복장 미술 등 각 분야에서 남긴 행적을 주제로 폭 넓고 깊이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오늘날 카사노바는 이렇게 음악, 뮤지컬, 관광상품, 인터넷 동호인사이트 속에서 불멸의 인물로 등장한다.

카사노비스트들은 화려하게 살다간 18세기의 인물 카사노바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카사노바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만 있다면, 삶을 자신을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러워한다.

카사노비스트들은 카사노바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거나 그의 저서를 번역 출간해 돈을 벌기도 하고 이를 통해 카사노바를 하찮은 바람둥이라는 부당한 선입견에서 구해내고 있다.

나는 서양 고서(古書)를 통해 카사노바의 삶을 재발견했다. 그래서 그의 흔적을 뒤쫓아 유럽의 많은 곳을 방문했고 또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카사노바가 남긴 기록물을 찾아 헤맸지만 그것들은 이미 유럽 각국의 국립도서관에 있거나 박물관에 보관돼 있었다. 카사노바라는 이름은 20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유명하기 때문에 그의 어떤 흔적이라도 수집하려면 큰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 나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카사노바의 흔적을 찾아갔던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베네치아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지난 3월 6일자 베네치아의 한 일간지는 자살로 추정되는 한 시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이 시인은 공교롭게도 내가 다음 날 만나기로 한 ‘카사노바협회’ 회장인 마리오 스테파니였다. 시인이자 대학교수인 그는 카사노바를 위해 시집을 낸 사람이다.

자신이 전생에 포도나무였다고 말했던 그 시인은 죽어서 와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삶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 붉은 포도주로 환생하여 카사노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었던 같다. 그는 카사노바처럼 일생 결혼하지 않았다.

카사노바를 예찬한 그의 시집은 한정본으로 출판돼 카사노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장됐다. 내게도 그의 시집이 있다.

이제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멋진 남자’ 카사노바와의 동행을 마감하려 한다. 환상적인 여행을 마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하지만 나도 어느새 카사노비스트가 다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김 준 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 대표)jimkim@antiquus.co.kr

-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