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창간81돌]1920년 '東亞정신'과 81년의 발자취

  • 입력 2001년 4월 1일 19시 04분


《당시만 해도 치마를 입은 다 큰 ‘처녀’들이 라켓을 들고 코트를 누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1923년 6월 30일, 제1회 전조선여자연식정구대회가 전격 열린 것은 남녀유별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가부장사회에 대한 일대 ‘반란’이었습니다. 대회를 앞두고 폐지 여론이 거세었습니다. 주최측은 ‘젊은 남성의 입장을 불허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대회를 강행했습니다. 결과는 2만여명의 관중이 몰린 대성공. 단순 체육행사를 뛰어넘어 ‘여권’이란 문제의식을 처음 제기한 이 대회를 연 것은 동아일보였습니다. 격변의 현장에는 늘 동아일보가 있었습니다. 5공 군사정권을 몰락의 길로 몰아 넣었던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동아일보를 통해서입니다. 1920년 4월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라는 사시(社是)를 독자와 함께 실천해 왔고, 오늘 아침 여러분이 보신 지면 곳곳에도 이러한 ‘동아정신’은 빠짐없이 녹아있습니다. 》

동아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국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다.

31년 3월 21일,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과 함께 서울―영등포간 50리길을 뛰는 ‘제1회 마라톤 경주대회’가 열렸다. 역사적인 동아마라톤의 효시였다. 동아마라톤은 그후 72회를 거치면서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등 걸출한 스타들을 배출했다. 94년 제65회 대회부터는 국내 최초로 일반인이 참여하는 마스터스부문을 신설해 명실상부한 전국민의 마라톤으로 자리잡았다.

25년 동아일보는 국내 언론사상 최초로 신춘문예 공모를 시작해 36년 김동리(金東里) 서정주(徐廷柱), 79년 이문열(李文烈) 등 문단의 거목이 될 수많은 인재들을 발굴해냈다. 65년에는 시나리오 부문을 신설해 ‘소설 동의보감’의 저자 이은성(李恩成)을 발굴했고 80년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서는 ‘혼불’의 최명희(崔明姬)를 탄생시켰다.

동아일보의 선택은 최근까지도 기존의 문학 패러다임을 한발짝씩 앞서갔다. 사회성이 강조되던 85년 세기말의 허무를 앓는 젊은이들의 감성을 대변하게 될 시인 기형도(작고)를 발탁한 것이나 여성작가 돌풍이 몰아치기 직전인 95년 중편소설 부문에 은희경과 전경린을 공동 당선시킨 사례 등이 그것이다.

동아일보가 지면을 통해 절대권력에 저항한 사례는 이미 역사책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일제하에서 창간 보름만에 ‘평양에서 소요발생’ 기사를 실었다가 발매 금지조치를 당한 이후 총독부의 검열에 저항하다 모두 4차례의 정간과 512차례의 압수 등 행정처분을 당하고 1940년 폐간됐다. 민립대학설립, 조선물산장려, ‘브 나로드(민중속으로)’ 운동 등을 주도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4차 정간을 당했다.

해방이후에는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정부의 실정(失政)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비판해 왔다.

우선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독단으로 흐르자 반독재의 기치를 높이 들고 비리를 낱낱이 폭로하기 시작했다. 1955년 8월 실시된 지방선거부정 폭로는 대표적인 예다. 전북 정읍군 소성면 투표함을 개표소로 이송하는 도중 호송 경찰관들은 투표함을 뜯어 표를 바꿔치기 했다. 문제의 투표함 호송에 동행했던 소성지서 박재표(朴在杓)순경은 고민 끝에 근무지를 이탈해 동아일보를 찾았다. 동아일보는 투표함 바꿔치기의 진상을 상세히 보도해 관권 개입의 문제점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 보도는 전국을 발칵 뒤집었고 4·19의 원인(遠因)이 됐다.

1961년 5·16 쿠데타가 터져 군정이 시작됐지만 동아일보의 감시의 눈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6월3일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의 기자회견 골자를 ‘정권의 조속한 민간이양’으로 뽑았다. 군정당국은 김영상 (金永上)편집국장과 정경부 조용중(趙庸中) 차장, 이만섭(李萬燮) 이진희(李振羲)기자 등을 연행했다. 이만섭 이진희 기자는 한달이상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 군정당국은 왜곡을 시인하고 정정보도를 내면 두 기자를 석방하겠다며 타협을 제의했으나 동아일보는 거부했다.

박정희(朴正熙)정권이 국민투표를 통해 3공화국 헌법을 확정하려 하자 동아일보는 62년 7월28일자 사설에서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군사정부는 이 사설을 문제 삼아 고재욱(高在旭)주필과 황산덕(黃山德·서울대 법대교수 겸임)논설위원을 구속했다. 필화사건으로 주필과 논설위원이 모두 구속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 사설 파동은 군정하에서 겪은 수난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것 중 하나였다.

72년 10월유신 선포 이후 언론통제는 극에 달했고 동아일보도 비판과 저항에 어려움을 겪었다. ‘10·24 동아자유언론 실천선언’은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탄생했다. 74년 10월 24일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보도키로 의견을 모았고 회사측도 이를 수용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주장하고 나서자 정부는 광고탄압에 나섰다. 광고주들이 하나 둘 광고계약을 해제하기 시작했고 광고탄압이 한달을 넘기자 회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다. 빈 광고란은 독자들의 격려광고로 메워졌다. 경영난에 의한 기구축소과정에 이어 권력의 탄압에 대항하는 방법론을 놓고 제작참여론과 제작거부론이 맞서는 과정에서 기자들과 사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80년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직접 신문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언론에 족쇄를 채웠다.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이 터지자 바로 이튿날인 19일 남시욱(南時旭)논설위원은 광주 관련 사설을 썼다. 하지만 붉은 사인펜을 든 검열관은 원고지 위에 마구 줄을 그어댔다.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사설을 빼고 다른 사설만 내보낼 수 없었다. 동아일보는 아예 사설을 없애기로 했다. 닷새 동안 계속된 무사설의 저항은 이렇게 시작됐다.

80년 12월 언론통폐합의 광풍이 몰아친 이후 기나긴 ‘겨울’이 이어졌다. 하지만 세계의 ‘엘리트 페이퍼’를 엄선해 발표하는 국제 저널리즘의 감시탑 미국 미주리대학은 85년 동아일보를 ‘85년의 가장 훌륭한 언론기관’으로 선정하고 언론공로상을 수여했다.

5공화국의 철권통치는 온갖 수난을 각오하고 진실을 파헤친 동아일보의 특종보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87년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 사건에 대한 집중 추적보도는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서울대생 박종철군 사망사고가 알려진 뒤 이를 철저히 파헤쳤다. 1월 22일 마침내 박군이 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과 사인 은폐축소 조작의 배후를 밝혀내 1면 머릿기사로 특종보도했다. 박종철사건 관련 보도는 해방 이후 한국언론사에서 가장 파장이 컸던 특종으로 기록된다.

93년 김영삼(金泳三)정부가 들어선 뒤 동아일보는 공직임명자들의 자격검증을 시도했으며, 98년 김대중(金大中)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동아일보는 인사편중, 졸속적인 의약분업 등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과감히 지적, 비판하고 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