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 구상시인 신앙고백

  • 입력 2001년 3월 22일 18시 50분


◇"신을 제대로 알게 된 후부터 오히려 고민 속에 살았어요"

“기독교는 인간적인 종교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에게 해탈(解脫)이나 도통(道通)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냥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뿐이지요.”

가톨릭 신자인 구상(具常·82)시인이 사순절을 맞아 20일 서울 동숭동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생명 목회 콜로키움’에서 ‘한 기독교 시인의 체험적 문제의식’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힘든 노구를 이끌고 나와 잔잔한 감동의 자리를 만들었던 것.

가톨릭 집안에서 모태신앙을 갖고 태어난 시인은 “… 하숙방 다다미에 누워/나는 신의 장례식을/날마다 지냈으며….”라는 자작시를 읽으면서 일본 유학시절 신에 대해 가졌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줬다.

그러던 어느날 프랑스 시인 폴 클로델의 글을 읽고 신에 대한 회의가 오히려 신앙의 한 가운데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로델은 18세 때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성서에 씌어진 것보다 더 명백히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신비체험의 소유자가 ‘우리가 신을 참되게 알았을 때 신은 우리를 오히려 동요와 불안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말하다니 제게는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시인은 영국 가톨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작품 ‘하늘의 사냥개’를 인용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그로부터 도망쳤다/…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으로/유유한 속도, 위엄있는 긴박감으로/그 발자국 소리는 울려왔다/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울려오는 한 목소리/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게 저버림을 당하리라….”

신을 하늘의 사냥개에 묘사한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톰슨은 역설적으로 신은 그로부터 아무리 달아나고 뿌리치고 숨어도 자기를 좇아온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시인은 이어 최근 작고한 시인 서정주의 ‘내가 돌이 되면’이라는 시를 읽었다.

“내가 돌이 되면/돌은 연꽃이 되고/연꽃은 호수가 되고/내가 호수가 되면/호수는 연꽃이 되고/연꽃은 돌이 되고….불교적 범신론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존재의 차별이나 차등이 완전히 해소되고 맙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인식에서 하느님은 영원히 하느님이요,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요, 산천초목은 영원히 산천초목인 것입니다.”

시인은 결국 소박한 고백으로 말을 맺었다.

“저는 지각이 생긴 후, 즉 크리스마스 밤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간다는 사실을 믿지 않게 된 때부터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신자이기 때문에 평안을 누렸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민 속에 살았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생명목회 콜로키움은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목회자의 영성 심화를 목적으로 교파를 초월해 운영하는 공동 세미나프로그램으로 매월 세째주 화요일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진행된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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