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3년간 무문관수행' 회향 앞둔 원산스님

  • 입력 2001년 3월 5일 18시 35분


경남 양산 영축산속 깊은 암자 백련암(白蓮庵). 이 곳 죽림굴(竹林窟)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아무도 드나들 수 없으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문, 무문관(無門關)이다.

원산(圓山·57) 스님이 3년을 기약하고 무문관에 들어간 것은 98년 음력 2월 보름. 오는 9일이면 음력으로 꼭 3년째가 된다. 긴 세월동안 시봉(侍奉)하는 스님만도 세 명이 바뀌었다. 현재는 상좌 정래(正來)스님이 하루 한 번씩 사시(巳時) 예불 후 토굴 담장에 난 작은 구멍으로 공양을 넣어드린다. 음식은 밥과 약간의 반찬이 전부다. 상좌는 스승의 공양그릇이 비워지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는다. 간혹 공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날도 있다. 이런 날은 스승이 방문을 열고 담장까지 걸어나오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아픈 날이다. 문이야 부수고라도 들어서면 그만일 것이지만 무문의 약속을 깰 수도 없으니 상좌의 마음은 안타까울 뿐이다.

상좌 자신도 지리산 칠불암에서 3년 무문관 수행을 해본 적이 있다. 혼자는 아니었고 19명의 대중(大衆)과 같이 한 결사였다. 그 중 5명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때도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것은 예외로 했었다. 하지만 스승은 한 번도 몸이 아프니 문을 열라고 한 적이 없다.

원산 스님은 원래 선승(禪僧)이 아니라 경전을 연구하는 학승(學僧)이었다. 63년 통도사 극락암으로 출가할 때 은사가 경봉 대선사이었고, 선승의 길을 가기 위해 여러 절을 돌아다녔지만 어쩐 일인지 선방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결국 강원(講院)에 들어갔고, 직지사 관응 대강백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았다. 직지사와 통도사 승가대학의 강주(講主)를 역임하고, 95년부터 3년간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냈다. 종단의 원장소임까지 마치고 큰 스님의 반열에 들어갈 나이의 늙은 학승이 젊은 선승들도 쉽지 않은 무문관 수행을 자처했을 때 주변에서는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한말 한국 선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도 원래 학승이었다. 우연히 전염병이 도는 마을을 지나다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팔만사천 경전의 언어들이 생사를 초탈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계룡산 동학사의 독방에서 식음을 전폐하면서 용맹정진했는데 평소 잠이 많은 편이어서 뾰족한 칼을 목에 대고 수행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수행이었다. 그 결과 큰 깨달음을 얻어 선풍의 맥을 크게 진작시킬 수 있었다.

말 있음으로써 말없는데 이르는 것이 교(敎)라면,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데 이르는 것이 선(禪)이라고 했던가. 죽림굴로 들어가는 문앞 계단에는 출입금지를 알리는 팻말이 놓여 있다. 스님이 계단을 올라 홀로 침묵의 비장한 공간으로 들어간지도 3년이 다 돼간다. 사흘 후 스님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올 것이다. 상좌들은 지금 조촐한 회향법회를 준비하고 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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