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천주교 과거사 반성 내용]구체적 사건보다 포괄적 참회

  • 입력 2000년 11월 30일 18시 58분


한국 천주교가 발표한 과거사 반성문건은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후 200여년만에 처음 있는 일인 데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주교회의 명의로 발표됐다는 점에서 교계 안팎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반성문건은 지난 3월12일 가톨릭교회가 지난 2000년 천주교 역사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전 세계를 상대로 용서를 구한 연장선 상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은 이 용서청원이 나온 뒤 산하 사목연구소안에 ‘역사신학위원회’를 설치, 이 문제를 연구해 왔다. 이들은 지난달 반성문건 내용을 확정한 다음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12월3일 대림 첫 주일을 기해 공식발표하도록 한 것.

교황의 용서청원 이후 미국 브라질 칠레 등 10여개국 가톨릭교회가 이미 과거 반성에 동참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일본의 주교단은 지난 95년 세계2차대전과 아시아 각국에 행한 가혹행위에 대해 사죄하기도 했다,

이번 반성문건은 구체적인 사건을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포괄적 의미로 참회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문건 가운데 ‘가톨릭이 외세의 힘을 이용했다’는 내용은 1801년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함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황사영 백서(帛書)사건과 1866년 프랑스가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강화도에 침범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톨릭이 민족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를 제재했다’는 구절은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천주교 신자 안중근(安重根)의사를 당시 뮈텔 주교가 ‘살인자’로 규정하고 파문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단상황 극복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언급은 한국전쟁 등에 지나친 반공이념으로 대응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는 것.

문제는 일제치하 천주교 성직자들의 신사참배가 언급되지 않은 점이다. 김종수(金宗秀) 주교회의 사무총장은 “당시 신사참배는 교황청에 자문을 구한 뒤 이뤄진 것으로 종교의식보다 정치의식으로 여겨졌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신사참배를 허용한 노기남(盧基南) 당시 대주교의 방계 후손이나 후배들이 이번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또 조상제사 금지는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문화적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식으로 애매모호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번 참회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이기주의와 불신이 만연하는 시대에 신선한 파장을 던져주었다는 지적과 함께 사상의 깊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가 약하다는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참회록'쇄신과 화해'(요약)

대희년과 함께 새 천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면서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자신을 정화하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 주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제삼천년기’33항)이라고 하시면서 교회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참회하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1. 우리 교회는, 세계 정세에 어둡던 박해 시대에, 외세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지키고자 한 적도 있었으며,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문화적 갈등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2.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3. 우리 교회는 광복 이후 전개된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빚어진 분단 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홀히 한 점을 반성합니다.

4. 우리 교회는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노력도 부족하였음을 반성합니다.

5. 우리 교회는 모든 이가 올바른 가치와 도덕을 바탕으로 서로 이해하며 더불어 살아가도록 이끄는 데에 미흡하였습니다.

6. 우리 교회의 성직자들도 때때로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귀감이 되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빠지거나 외적 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등 세상 풍조를 따르는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7. 우리 교회는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 안에서 다른 종교가 지닌 정신 문화적 가치와 사회 윤리적 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잘못도 고백합니다.

2000년 12월 3일, 대림 첫 주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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